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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변홍규(1899-1976)

손상웅 목사

(한미교회사연구소 소장)

1928년 목사안수(북감리교뉴욕연회), 1929년 드루신학교 신학박사학위 취득

호항감리교회, 하얼빈교회 목회 후 귀국, 성서위원회 감신학장 담임목회 등

 

변홍규(卞鴻圭)는 1899년 5월 28일에 충청남도 공주에서 출생하였다. 1913년에 공주 영명학교를 나와 임시정부의 김규식을 만나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하였는데 나이가 어려 불가능하다며 공부할 것을 일러주어 1919년 중국 청도에 있던 독일계 덕화서원을 졸업했다. 이 무렵 필신이라는 호와 프리츠(Fritz Hong-Kyu Pyun)라는 영어 이름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루터교회 선교사였던 양부인 독일인 목사의 주선으로 도미하여 미국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에 있는 햄린대학에 입학하여 성서문학과에서 공부하고 1925년에 졸업했다. 졸업한 그해에 뉴저지주 매디슨에 있는 드루신학교에 입학하여 학생 신분이면서도 독일어 강의를 맡았고, 1928년에 드루신학교를 졸업하였다. 드루신학교를 졸업하던 그해에 미국 북감리교 뉴욕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드루신학교에서 신학박사과정에 들어가 구약 성서의 거룩에 관한 연구로 1929년 6월에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가 ‘신학세계’ 제18권 1호에 기고한 “성하라”는 단지 학문적 연구를 뛰어넘어 거룩을 체험하고 노력한 신학도로서 그를 두고 ‘세인트 변’이라고까지 불렀다.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제일한인감리교회는 미국 북감리교 하와이 선교부에 미국에서 공부한 목사로서 영어로 설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한인사회를 대표할 수 있는 목사를 파송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런 가운데 1930년 9월에 변홍규가 제일한인감리교회에 부임했다. 

변홍규가 ‘신학세계’ 제19권 4호에 게재한 “하와이생활의 추억” 중 일부분을 오늘날의 말로 옮기면서 그의 부임여행과 함께 사역을 엿보기로 한다. 

“신학교 학창을 떠나서 내가 처음으로 일을 시작한 곳은 하와이다. 미국 상항에서 배를 타고 약 한 주간을 지나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때 나는 이상한 감상이 있었다. 바울 선생이 지중해 해안에 있는 여러 교회를 심방할 때 어떠한 감상을 가졌었나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복된 소식을 가지고 산을 넘어오는 자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우냐?’하는 거룩한 말씀에 댓구가 될 만한 말은 전도하러 여행하는 자의 마음이 얼마나 기쁘냐 함이다. 나는 전도하러 길을 떠날 때 늘 기쁨이 내 마음속에 생수같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특별히 호놀룰루에 도착할 때 더 기뻤다. 내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됨이요, 둘째는 하와이에 우리 조선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부두에는 호항교회에서 교우 몇 분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서 그네들을 내다볼 때 눈물이 자연히 나오게 되었다. 아- 여기서 우리 동포들이 30년 동안이나 땀을 흘렸구나 하는 생각이 났다. 배가 닿자 하와이감리교회 감리사 프라이 박사와 호항 기독교청년회 조선총무 이태성씨가 배에 올라와서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배에서 내려서 환영 나온 교우들을 또한 반가이 만났다. 

이태성씨의 안내로 기다리고 있는 교회로 갔다. ‘이 집이 내 하늘 아버지의 집이로다. 이제는 내가 여기서 일을 하게 되었구나. 학창에서 일터로 나섰구나’하는 깊은 감상이 교회에서 내가 감당치 못할 만큼 성대한 환영을 해주었을 때 일어났다. 하와이는 참으로 태평양의 낙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는 겨울 추운 때가 없이 사시장춘이다.... 하와이는 성지와 같다.... 

나는 조선인 감리교회를 맡아보았다. 주일학교는 영어로 하고, 예배는 우리말로 보았다. 제2세들이 우리말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영어로도 설교를 해야 할 형편이었다... 나는 2년간 호항교회를 맡아보며 교우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잃어버린 양을 다시 찾으려 심방하는 일을 많이 하게 되었다. 송치순씨와 문또라씨 두 분은 전력을 다해서 교회 일을 도와주며 심방을 같이 했다....”

1931년 8월 29일 저녁 7시 30분에 호놀룰루 민단 주최로 밀러 길에 있던 총단관 내에서 50여 명의 동포가 모여 국치기념식을 거행했다. 주석에 단장 손덕인이 맡았고, 변홍규가 기도하였다. 그리고 홍한식과 서진수와 박종수와 마주흥이 연설하고, 미감리교회 부인 찬양대가 창가를 한 후 이용직의 축사로 마쳤다. 

호항 감리교회와 1918년 7월에 호항 감리교회에서 분열한 한인기독교회가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1931년 8월 30일 오후에 약 300명이 왯기기 공원에 모여 연합 소창회를 개최했다. 한길수의 사회로 한인기독교회 목사 이용직이 기도하였고, 호항감리교회 목사 변홍규가 간단한 말씀을 전했다. 이후 미주에 다녀온 강영각에게 언권을 주어 청년운동에 대한 열렬한 연설을 들었는데 일반 교우들은 매우 흥미있게 들었을 뿐더러 청년운동을 찬성하며 박수갈채를 보냈다. 이날 양 교회 교인 사이에 뜨거운 사랑과 동정이 많았다고 한다. 이 연합 소창회는 변홍규의 제안으로 성사가 된 듯이 보인다.

1932년 2월은 하와이 역사상 제일 비가 많이 왔다. 3, 4주 동안 끊임없이 폭풍우가 내린 가운데 그달 11일부터 15일까지 미국감리교 연환회가 있었다. 이 연환회에서 변홍규는 호항교회로 계속 파송 받았다. 그 외 안창호는 와히아와교회로, 홍한식은 와일누아교회로, 현 순은 가와이교회로, 임준호는 마위교회로 그리고 이관묵은 힐로교회로 파송하였다.

그달 26일 저녁 7시30분에 호항감리교당에서 소년 동맹단 주최로 3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네 성가대의 성가 경연대회가 있었다. 이용직 목사가 담임하는 한인기독교회 찬양대가 1등 했고, 오일누아에서 온 이동빈의 찬양대가 2등을 했다. 등수에 들지 못한 다른 두 찬양대는 강영각이 인도하는 와히아와교회 찬양대와 변홍규가 담임하던 호항교회 찬양대였다.  

변홍규가 누가복음 12:13-21을 본문으로 한 “인생의 성공”이라는 아래의 설교를 통해 그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찾아볼 수 있다. “‘오직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은 즉 네 예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부자가 되고 하나님을 위하지 아니하는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한 사람이 있는데 저는 재주가 있어서 농사도 잘 짓고, 곡식을 많이 추수했으며, 지혜가 있어서 곡간을 크게 지어 곡식을 그곳에 쌓아두며 재산이 있어서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세상 사람의 눈으로는 저가 인생의 성공자이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저가 실패자올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이 세상의 안목으로 보면 실패입니다. 예수께서는 아주 가난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거짓 유대인의 왕이라는 누명 하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때리고, 창으로 찔림을 당하셨습니다. 이로 보면 예수는 실패자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면 성공하신 분이십니다. 그 원인은 예수의 생활 원칙이 ‘너는 네 생을 희생하라’한 데 있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네가 너를 알라’하였고, 석가는 ‘네가 네 생을 부인하라’하였고, 공자는 ‘너는 네 생을 다스리라’하였으나 예수는 ‘너는 네 생을 희생하라’하셨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그는 최후의 승리를 얻은 것이올시다. 자기만 아는 이는 아무리 많은 학식과 기술을 가졌다고 하더라고 그는 실패자올시다. 우리는 예수의 본을 받아야 성공한 사람들이 될 것이올시다. 그러면 인생 성공의 요소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목적–목적이 없으면 성공을 못합니다. 이 목적을 향하여 전력을 다하여 나갈 때에 성공이 있는 것입니다. 목적이 없으면 갈대와 같이 흔들리며 부평초와 같이 정처 없이 떠다니게 됩니다....

2. 방향을 정할 것-어떤 이가 코넬대학을 등지고 묻기를 코넬대학이 어디냐고 하기에 당신이 가는 길로 1만4천 마일을 가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반대 방향으로 가니까 그대로 가면 세계 일주를 하여야 나오게 되겠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원주가 1만4천 마일입니다. 이와 같이 방향을 잘못 정하면 목적이 있다고 해도 아니 됩니다. 우리의 방향은 예수의 십자가올시다. 이는 우리가 갈 바 옳은 길이요. 우리가 성공하려면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께서 가신 그 길을 가야할 것입니다.

3. 시작을 바로 함–자동차를 운전할 때 먼저 엔진에 발화를 시키고, 다음에 움직이게 하고, 그다음에 속도를 내는 것과 같이 우리가 성공하려면 시작을 제대로 잘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을 시작하는 것이 바로 하는 것입니다. 

남북 아메리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방은 처음에 구라파 사람들이 금과 은을 캐러왔기 때문이요. 북방은 선교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건너와서 맨 처음에 한 것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것이올시다. 그래서 지금은 세계적으로 문명에 공헌하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작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야 합니다.

4. 노력–시작한 후에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조선 사람은 재주가 있으나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노력을 하여서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발휘하여서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수고하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것입니다.“ 

2년 동안 호항감리교회에서 목회한 변홍규는 성별된 사람으로 의무에 대한 헌신과 자기를 생각지 않는 성품은 놀라운 감화를 주었고, 필요한 영적 지도자로서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는 목사로 인정을 받았다.

1932년 11월 7일 저녁에 학생 기숙소 내에서 호항감리교회와 와히아와교회가 변홍규 목사 송별연을 열었다. 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부인 보조회에서 준비한 음식을 나누면서 그의 인격과 깊은 종교적 신앙을 찬양하였고 그에게 값있는 선물을 기증하였다. 

호놀룰루를 떠난 변홍규는 북만주에 있는 하얼빈교회로 이동하여 1년간 한인들을 목회하였다. 

1934년에 변홍규는 서울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였고, 1937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한국성서위원회 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듬해 1939년에는 일제에 의해 해임당한 브리스 W. 빌링스 교장 후임으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감리교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1940년 6월에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등 반일 전단이 교정에서 발견되어 이른바 감리교신학교 삐라사건으로 변홍규는 기숙사 사감 정일형 등과 함께 구속되었고, 학교는 문을 닫았다. 3개월 영어생활 후 그는 1941년에 종교교회에 부임하였고, 1943년에는 동대문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시무하였다. 

1942년 12월에 감리교 통리사로 선출되어 일제의 전시체제에 반강제로 협조했다. 해방 후 1946년에 그는 감리교 신학교를 재건하여 다시 감리교 신학교 학장으로 부임하였다. 그 후 1948년에 남산교회에서 시무하면서 1949년에 기독세계사를 통해 ‘신학원론’을 냈고, 1959년에 경천애인사가 그가 쓴 ‘창세기강해’를 출판하는 등 한국감리교 첫 신학박사였던 만큼 저서뿐만 아니라 여러 논문을 남겼다. 

WCC 창립총회 한국 대표, 한국 MRA 대표, 수도여자사범대학 이사장, 한국복음주의협회 회장, 한국기독교 문화원장 등을 역임하였고, 1967년에 대한감리회 제9대 감독에 피선되었다. 1970년에 퇴직한 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성서학원/신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고, 콜로라도주 덴버로 이주하여 한인교회 목사로 시무하다가 1976년 7월 27일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덴버 인근 패어마운트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04.0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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