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그리스도인의 이 땅의 삶과 영원한 삶
3) 영원한 삶에 대한 열망
(1) 우리는 이 세상적인 삶에 대한 무절제한 사랑으로부터 천국의 삶에로 옮겨야 한다.
우리의 최고선은 결코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최고선이라는 것은 신속하게 사라진다. 이방인들에게는 하나님의 빛과 참된 종교가 결여되어 있다. 그들이 지상생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궁핍함과 두려움 밖에 무엇이 있겠는가? 어떤 사람들은 친척 가운데 한 사람이 죽으면 기뻐하면서 그날을 휴일로 정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참된 신앙의 교리가 없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는 행복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판단은 절망으로 끝난다. 하나님의 종들은 항상 이 목표를 추구하면서 이 썩어질 삶을 신중하게 평가해야 한다. 그 삶속에 들어 있는 것은 단지 비참함뿐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면서 좀더 열심히 장차 다가올 영생에 관하여 묵상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2) 현세의 삶과 영생의 삶을 비교해 보며 살아야 한다.
현세의 삶은 영생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임을 깨닫게 된다. 하늘나라가 우리의 고향이라면 이 땅은 추방의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이 세상은 무덤 외에 무엇이겠는가? 이 세상 속에 머무르는 것은 죽음 속에 가라앉혀 있는 것과 같다. 이 몸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자유라면 몸은 감옥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최고의 행복이 하나님의 현존을 누리는 것이라면 그것을 향유하지 못하고 있다면 비참한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이다”(고후 5:6). 그러므로 이 땅위에서의 생활을 하늘나라의 생활에 비유한다면 당연히 그 생활은 조롱의 대상이요 연기와 같이 취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이 우리를 죄에 복종하도록 하지 않는 한, 그 삶을 결단코 증오해서는 안 된다.
(3) 이 땅위에서의 삶도 의미가 있다.
이 땅위에서의 삶에 지쳐버렸을지라도, 그 삶의 종말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알면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기꺼이 그 안에 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지쳐 있지만 불평을 늘어놓거나 성급한 마음을 갖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 땅위에서의 삶은 마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정해주신 장막과도 같은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소환하실 때까지 우리는 이 장막 안에 거주해야만 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육체라는 감옥에 너무 오랫동안 갇혀 있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면서 그 감옥으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기를 원했다(롬 7:24).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형태의 삶이라도 순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단언한다(빌 1:23이하). 왜냐하면 그는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삶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롬 14:8).
(4) 우리가 이 땅에 살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의 결정에 맡기자!
주님의 영광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는 주님께서 결정할 문제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우리의 죽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까지도 주님의 결정에 맡기자!(여기서 칼빈은 자살을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우리의 죽음을 소망하고 끊임없이 그것에 관하여 묵상하면서, 장차 다가올 영생을 위하여 이 썩어질 삶을 조롱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는 판단만 세워진다면, 기꺼이 이 땅에서의 삶을 포기하는 삶을 사는 것은 죄악이 우리를 죄의 사슬에 얽매이지 않게 한다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더라도 분명 유익한 일이다.
4)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 것,
(1) 죽음은 결코 두려워할 것이 못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죽음을 동경하는 대신에 죽음을 두려워하여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를 듣는 즉시 마치 아주 큰 불행이 찾아오기나 한 것처럼 두려워 떠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우리의 몸이 영혼으로부터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놀라는 것은 자연적인 감각이 움직이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로서, 그렇게 놀라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마음속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아무리 커도 더 큰 위로로써 그 두려움을 극복할만한 빛이 없다는 것은 전적으로 부당한 것이다. 만약 우리가 연약하고 결점 투성이로서 부패하고 덧없고 썩어가는 이 육신의 장막을 벗어 버리고 난 후에 변함이 없고 썩지 아니하며 거룩하고 완전한 영광으로 회복될 것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본성이 회피하려하고 두려워하는 그 복된 일을 우리가 추구하도록 우리의 본성이 자극하지 않겠는가?
(2) 오히려 우리는 마지막 날을 동경해야 한다.
죽음에 의해 우리가 불행한 이 땅의 유배생활로부터 우리의 본향인 하늘나라에 거주하도록 부름 받는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본다면 우리에게 위로를 줄 대상이 이 하늘나라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어떤 이들은 모든 것들이 현존하는 상태 그대로 머물고 싶어 하는 법이라고 반대할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장래의 불멸성을 갈망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상 그 어느 곳이라도 거기서 누릴 수 있는 것과 같은 견고한 상태를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야생동물과 심지어 나무나 돌과 생명이 없는 피조물들까지도 그것들의 허무함과 부패성을 알려줌으로서 “그것으로부터 해방될 심판의 날”을 동경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롬 8:21). 더욱이 먼저 자연의 빛을 어느 정도 받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조명을 받은 우리들이 우리의 실존 그 자체가 위험에 빠져 있을 때 이 육신의 후패함을 뛰어넘어 우리의 눈을 높이 들어야만 한다(롬 8:19-22). 기쁘고 명랑한 마음으로 죽는 날과 마지막 부활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리스도의 학교에서는 별로 진전을 이룰 수 없다.
(3) 우리의 가장 행복한 날을 바라보자
사도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두드러진 특징을 기쁨에서 찾는다. 성경은 기뻐해야 할 이유가 나올 때마다 기뻐하라고 권고한다(딛 2:13; 딤후 4:8). 주님은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어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눅 21:28)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충분히 기뻐할 수 있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각하신 일이 우리에게 슬픔과 좌절만을 안겨준다면 과연 이것이 타당한 일이겠는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자랑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이제 우리의 생각을 좀 더 높여보자. 우리의 육신의 욕망, 곧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욕망이 그것을 거부해도 주님의 다시 오심이 가장 행복한 일임을 기억하고 그것을 기다리자. 단지 소박한 동경의 마음으로 뿐만 아니라, 슬퍼하고 탄식하는 마음으로 기다리자. 우리의 구주이신 주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온갖 악과 불행으로 가득한 이 깊음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신 후에 영광의 기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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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0.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