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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신앙 회복 및 부흥(復興)”(7)

김경일목사

남가주행복찬교회담임

총신대CA 총동문회장

2. 미국 청교도들의 정착(定着, Settlement)과 확장(擴張, Expansion)

 

월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는 순례자들이 영국을 떠나 플리머스(Plymouth)로 간 것은 “형식적인 의식과 기도서에 대한 논쟁과 종교적 박해와 교황적이고 반기독교적인 허튼 소리 때문이었다”라고 했다. 또한 월리엄 허버드(William Hubbard)는 매사추세츠(Massachusetts)로 이주한 이유를 “이 어두운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였다고 기록했다. 청교도들은 종교개혁에 대한 기대가 수포(水泡)로 돌아가자 영국 국교회 안에 남아 개혁운동을 전개할 것인지, 아니면 교회개혁을 방해하는 왕을 수반으로 하는 영국 교회를 떠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한다. 

그들 중에 영국 국교회를 떠나 이상적인 교회 건설하기를 택했던 무리들을 청교도 분리주의자들이라고 불렀고,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에 남아서 개혁운동을 전개했던 무리들을 비분리주의자들이라 불렀다. ‘분리주의자(Separatists)’라 칭한 이유는 로마카톨릭의 잔재를 가지고 있는 영국 성공회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 그러한 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 ‘분리주의자(Separatists)’라는 이름은 바울 서신 고린도후서 6장 17절 “나와서…분리되어야 한다”(Come out…be separate)고 말한 부분을 인용한 것이다. 

이와 같은 분리주의 사상으로 인해 즉, 엘리자베스 여왕을 교회의 머리로 인정하지 않은 죄로 존슨은 1592년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된다. 후에 프랜시스 존슨은 상인들을 포섭하여 단체를 조직한 후 미국에 이민하여 분리주의자 중심의 식민지를 건설하고자 했다. 베로우와 그린우드는 1593년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1593년에 제정된 비밀집회 법에 의하면 16세 이상 된 자로서 성공회에 불참하고, 비밀집회(성공회를 반대하는 사람의 집에서 열리는)에 참석한 후 3개월 이내에 성공회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잉글랜드에서 추방되었으며 그들이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올 경우 교수형에 처했다. 

이 법 때문에 잉글랜드에 있던 많은 분리주의자들이 1607년부터 영국 국교회의 탄압에 못 이겨 영국을 떠나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던 화란(Netherlands)으로 이주한다. 로빈슨과 브루스터의 영도 아래 화란의 암스테르담 근교 레이든(Leiden)에 도착한 그들은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초대교회의 생활과 가까운 삶을 살았다. 교인수가 300명에까지 이른 그 그룹은 1620년까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바로 그 교회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나온 것이다. 

그러나 화란 역시 이상적인 곳은 아니었다. 심각한 경제적 시련으로 비참한 생활과 그들의 자녀들이 화란의 방종과 비신앙적인 분위기에 휩쓸리게 되는 것을 보고, 신대륙 미국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한다. 특히 브레드포드(William Bradford, 1590.3.19.-1657.5.9)의 저서 “플리머스 농장의 역사”에 의하면 화란(Netherlands)을 떠나 신대륙(the New World)으로 가게 된 4가지 이유를 기록했다. 

“첫째, 홀란드(Holland)에서의 경제적인 어려움, 둘째, 10년이 넘어가면서 필그림들이 나이가 들어갔으며 셋째, 그들의 자녀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함으로 학교에 다닐 수 없었고, 또한 더치(Dutch, 네덜란드인)인들과 결혼을 하고 세속화되어 가며 믿음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넷째, 복음주의적 청교도(Puritan)로서 미국 인디언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겠다는 열정이 있어서 신대륙으로 떠나기를 작정했다”라고 그 이유를 정확하게 기록했다. 

이렇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나겠다는 청교도들, 특히 그들은 “세계의 후미진 지역에서 복음을 전파하여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진 것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단계에서 위기가 발생한다. 분리주의자들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그 계약서에 적힌 용어들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를 내걸어 그 모험, 즉 신대륙으로 못 간다 한 것이다. 결국 출항을 위해서는 그 빈자리를 청교도가 아닌 일반인들로 채울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된 것이다. 

선교사 출신으로 타문화권을 30년 이상 체험한 필자는 분리주의자들의 이민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최고 문명국인 영국과 네덜란드에서의 현실적 체험과는 전혀 낯 설은 곳, 미지의 세계로 간다는 것은 ‘모’ 아니면 ‘도’의 모험이기 때문이다. 부부가 사별하면 스트레스지수가 100이라는 통계가 있다. 1967년 미국의 심리학자인 토머스 홈스(Thomas Holmes) 박사와 리처드 라헤(Richard Rahe)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배우자 사망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100점 만점에 100점으로 이혼(73점)을 하거나, 구속(63점) 및 해고(47점)를 당했을 때보다 컸다. 그런데 정보와 지식이 전혀 타 문화권, 특히 비 문명권, 미지의 세계로 간다는 것은 거의 패닉(panic, 공황) 상태의 스트레스 지수라고 할 수 있다. 

신대륙으로 떠나기 전에 로빈슨 목사가 에스라 8장 21절(…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말씀을 설교했으며 회중의 감사가 끝나자 그들을 위해 축도했다. 그리고 ‘모두 눈물로 서로 포옹한 다음 길을 떠났다’

 

1)최초의 청교도 이민선, 메이플라워(May Flower)호

1620년 9월 16일(율리우스력 9월 6일), 메이플라워호(길이 약 30m, 폭 7.6m의 유럽 여러 나라와 영국 사이에 주로 포도주를 운반하던 화물선)를 타고 신대륙으로 항해한다. 메이플라워호에 승선한 102명(성인 70명과 어린아이 32명)의 필그림들(Pilgrims, 순례자)과 30명의 승무원들은 대서양을 건너 11월 9일 계속 케이프 코드(Cape Cod Bay) 주위를 항해하다가 12월 11일에 미국 매사추세츠 주(Massachusetts)에 약간의 정찰대를 먼저 내리게 한다. 그리고 그 주위를 더 정탐한 후, 드디어 일주일 후인 12월 18일에 모든 필그림들이 신대륙 플리머스(Plymouth)에 하선한다. 이렇게 65일 동안의 대서양 항해기간 동안 월리암 벌튼(William Bulten)이 죽고, 또한 오셔너스 홉킨스(Oceanus Hopkins)가 신생아로 태어났다. 메이플라워호는 대서양 큰 바다를 횡단하기에는 너무도 작은 배였다. 참으로 위험하고 길었던 항해기간, 대서양에서 큰 폭풍우도 만났지만 모두 안전하게 플리머스(Plymouth)에 도착한 것이다. 윌리엄 브래드 포드의 메이플라워 항해 일지에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해상 풍토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세찬 바람과 폭풍을 만났다. 배가 심하게 흔들렸고 상갑판에 누수가 의심됐다. 선박 중앙의 대들보가 구부러지고 균열이 발생했다. 항해를 계속할 수 있는가에 대해 심하게 의견이 대립됐다. 선장은 항해에 자신이 있었으며 할 수 있는 수리를 했으며 방수 처리를 했으나 물은 또 샜다. 하나님께 맡기고 계속 항해하기로 했다. 폭풍과 높은 파도로 전진할 수 없었고 배는 며칠 동안 표류했다. 폭풍은 거대했다. 배가 폭풍 속에서 표류하고 있던 중에 ‘존 하우랜드’라는 청년이 바다에 떨어졌다.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으로 그를 마룻줄로 걸어서 바다 깊이 빠진 그를 올릴 수 있었고, 그는 의식을 잃지 않았고 보트와 갈고리로 그를 건져 올렸다.”

여호와 닛시(My Victory, flag),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이었다. 청교도들의 원래 목적지는 허드슨 강 하구의 현재 뉴욕시 인근으로 당시 영국의 버지니아 정착민의 북쪽 끝의 땅이었다(버지니아에서 플리머스까지 거리는 약 638마일이다). 그런데 미국 동해안은 항상 북서풍이 불기 때문에 차질이 생겼다. 메이플라워호는 항로를 이탈하여 늦게 도착하였기 때문에 때는 겨울철 이어서 케이프 코드(Cape Cod Bay)에서 머물며 배에서 겨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혹독한 추위와 괴혈병으로 반 이상이 죽는다. 1621년 3월 31일 살아남은 자들은 플리머스 해안까지 이동했고, 메이플라워호는 4월 15일 영국으로 돌아갔다.     

결론적으로 청교도들의 플리머스 도착은 하나님의 강권적 입김(?)이었다. 왜냐하면 버지니아(Virginia)는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처녀여왕’을 기념한 영국 최초 영구 식민지였다. 만약 예정대로 그곳에 도착했다면 청교도들의 자치권과 신앙의 자유는 전혀 보장 받지 못했을 것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필자주: 알렌 카든(청교도 정신), 제프리 행크스(교회사를 빛낸 거인들), 오덕교(청교도 이야기), 월리엄 브레드포드(History of the Plymouth Plantation), 배한극(미국청교도의 사상의 기원과 변천), 김승진(종교개혁가들과 개혁의 현장들)의 저서와 그 외 다수의 자료를 참조했다.]

06.20.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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