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미국 개혁신학의 역사 (3)

이길호 목사

(뉴욕 성실장로교회)

조나단 에드워드의 사후에 에드워드의 제자들에 의하여 형성된 신학이 뉴잉글랜드 신학(New England theology)이다. 이 신학이 19세기 초까지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의 개혁신학을 지배하였다. 뉴잉글랜드 신학은 사무엘 홉키스(Samuel Hopkins)의 뉴디비니티 신학(New Divinity)과 나다니엘 테일러(Nathaniel Taylor)의 뉴헤이븐 신학(New Haven Theology)이 합쳐져 뉴잉글랜드 신학이 이루어졌다. 

뉴디비니티 입장의 학자들은 구원론에 대단한 관심을 가졌다(“아담의 죄와 오늘 우리와 정확하게 무슨 관련이 있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믿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동일한 의미인가?    

조나단 에드워드의 제자들은 점진적으로 19세기 미국 환경에 맞게 수정된 칼빈주의 사상적 체계를 제공하였다.

사무엘 홉킨스(Samuel Hopkins, 1721-1803)는 조나단 에드워드의 윤리적 사상을 일관성 있게 발전시켰고, 조셉 벨라미(Joseph Bellamy, 1719-1790)는 구속론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전통적인 신학을 약간 수정하여 인간의 의지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결국 벨라미(Bellamy)의 제자이자 조나단 에드워드의 아들인 조나단 에드워드 주니어(Jonathan Edwards, Jr., 1745-1801)와 함께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미국 독립혁명시대의 법에 대해 영향을 받은 에드워드의 아들인 에드워드 주니어는 "속죄의 통치적인 이론(혹은 도덕통치론, “governmental theory of atonement”)"을 주장했다. 

속죄의 통치적인 이론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벌하지 않고 인간을 용서하실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를 유지하셨다는 것을 주장이다.  

벨라미(Joseph Bellamy)와 홉킨스(Samuel Hopkins)은 티모티 드와이트(Timothy Dwight)의 제자들이다. 티모디 드와이트가 예일대학교 학장으로 있으면서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티모티 드와이트(Timothy Dwight)가 외할아버지 조나단 에드워드가 살았을 때는 철저한 칼빈주의였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드가 죽고 난 후에 그의 신학적 입장이, 정통적인 칼빈주의에서 수정 칼빈주의자(Modifier Calvinism)로 변했다. 

그리고 점차적으로 예일대학의 입장은 조나단 에드워드 시대의 정통적인 칼빈주의 개혁주의에서 멀어져 알미니안주의로 나아갔고, 마침내 호레이스 부쉬넬(Horace Bushnell, 1802-1876)이 등장하여 결국 자유주의로 나아갔다. 

부수넬은 인간의 전적타락설을 믿지 아니했고, 인간은 교육에 의하여 달라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인간관과 구원관은 역사적인 칼빈주의로부터 크게 벗어났다.

뉴잉글랜드신학은 J. 에드워드 제자들이 형성해 19C초까지 개혁신학 지배

              New Divinity Theology와 New Haven Theology가 합쳐

부쉬넬은 영적 대각성 운동에서 조나단 에드워드의 인간의 전적 타락과 부패성에 대해(특히 죄인이 회개해야 한다는 설교들) 크게 반발하였고 인간은 교육과 양육을 통해 얼마든지 선한 사람으로 발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각성(부흥)운동을 매우 싫어했다. 

부쉐넬은 대각성 운동으로부터 부정적인 견해를 가질 뿐만 아니라, 독일의 이상주의와 영국의 낭만주의 학자인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Samuel Tayler Coleridge)의 영향을 받았다(사무엘 테일러 콜리지는 18-19세기 영국의 시인, 문학가, 철학자이며 영국에서 윌리엄 워즈워드와 함께 낭만주의 운동의 창시자다). 부쉐넬은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로부터 인간의 이성과 자유를 강조한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결국 조나단 에드워드의 제자들에 의해 출발한 초기의 뉴잉글랜드 신학(New Divinity, New Haven Theology, New England Theology)은 자유주의 신학으로 나아가는 길을 만들어주었다.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정통 개혁주의 신학에서 조금이라도 양보하거나 타협하면 나중에는 엄청난 비극적인 결과가 생기기 때문에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쳐야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후세들에게 정통 칼빈주의, 개혁주의 신학을 물려주어야 할 사명이 있다. 어렵지만 바른 신앙과 바른 신학을 지켜 보존해야하고 그리고 후세들에게 물려줘야하는 사명이 우리들에게 있다.

지금까지는 뉴잉글랜드 중심(미국의 회중교회)의 초기 청교도들의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살펴보았는데, 지금부터는 프린스턴(Princeton)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미국 장로교회 개혁주의 신학을 살펴보겠다.

A. 알렉산더의 프린스턴신학교 설립목적: 

            “높은 학문과 심령의 열정에서 나오는 경건 갖춘 목사 양육”

19세기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가르친 신학은 역사에 빛나는 미국의 위대한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유산을 남겼다. 이것을 우리는 프린스턴신학(Princeton Theology)라고 칭한다(어떤 신학자들은 Old Princeton Theology 칭하기도 한다). 이 분야에 많은 논문들과 책들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개혁주의 입장에서 가장 뛰어난 책 가운데 하나는 데이빗 카훈(Dr. David B. Calhoun)의 2권으로 된 “Princeton Seminary”(Banner of Truth, 1994)이다.

프린스턴대학교와 프린스톤신학교의 출발은 다르다. 프린스턴대학(Princeton University)은 1746년 “The College of New Jersey” 이름으로 세워졌고, 처음 학장은 조나단 디킨슨(Jonathan Dickinson)이다. 그러나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는 1812년 미국 장로교회 총회(the General Assembly of the Presbyterian Church)에서 장로교 목사들을 배출하기 위하여 세웠고, 첫 교수는 아치볼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1772– 1851)였다.

프린스턴신학의 기초를 세운 사람들은 최초의 교수(founding professor)인 아치볼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1772– 1851), 그리고 아치볼드 알렉산더의 제자인 찰스 하지(Charles Hodge, 1797-1878), 또한 찰스 하지의 제자인 벤저민 B. 워필드(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1851-1921)이다. 이들을 차례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아치볼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1772– 1851)

 

아치볼드 알렉산더는 프린스턴신학교를 세울 때 다음과 같이 신학교 설립 목적을 분명히 했다.

“프린스턴신학교 설립목적은 높은 학문과 심령의 열정에서 나오는 경건을 함께 갖춘 목사를 양육시키는데 있다. 학문 없는 열정 혹은 열정 없는 학문 모두 교회에 해를 끼친다”(The purpose of the Seminary is to unite...piety of the heart...with solid learning; believing that religion without learning, or learning without religion, in the ministers of the gospel, must ultimately prove injurious to the church).

알치볼드 알렉산더의 이러한 신학교의 설립 목적이 1811년 장로교 총회에서 채택이 되었고, 이듬해 1812년 개교하였다(The Plan of a Theological Seminary Adopted By the General Assembly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1811). 

당시 대부분의 장로교 지도자들은 아치볼드 알렉산더가 프린스턴신학교 교수로서 학문적, 영적, 인간관계에서 뛰어난 자질을 갖추었음을 알고 있었다.

스코틀랜드 이민자의 아들인 아치볼드 알렉산더는 어렸을 때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을 배웠지만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한 적이 없었다. 그는 자기의 친구들이 순회 설교자의 사역(the ministry of itinerant preachers)을 통해 극적인 개종을 경험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아치볼드 알렉산더는 친구들과 같은 감정적인 신앙체험을 경험하지 못했다. 

어느 날 존 플라벨(John Flavel)의 “거저 주는 복음(on the free offer of the gospel)”이라는 설교를 읽으면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각성하여 울기위해 숲으로 달려갔다. 복음이 그의 심령 깊은 곳을 움직였고, 그는 숲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한없이 울었다. 아치볼드 알렉산더는 이 경험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구원을 전에는 결코 이해하지 못했고 항상 내 손으로 어떤 대가를 치르려고 애썼다”(“I had always been striving to bring some price in my hand”). 알렉산더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러나 복음진리를 깨닫고 난후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치볼드 알렉산더는 복음에 대한 풍성한 감성과 동시에 예리하고 논리적인 이성을 지닌 사람이다.

윌리엄 그래엄(William Graham) 목사의 제자로 사역을 준비한 그는 19세에 목사안수를 받았고 5년 후 Hampden-Sydney College의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1807년 그는 필라델피아에 있는 장로교회에 담임목사로 청빙되어 필라델피아로 이사했고 곧 장로교 총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는데 이때 나이는 35세였고 매우 드문 일이었다.  

아치볼드 알렉산더는 영어보다 라틴어로 된 문학작품을 더 많이 읽었다. 그는 버지니아풍의 고상함(Virginian gentility)과 신사적인 성품, 그리고 목회적인 마음(pastoral heart)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았다.

아치볼드 알렉산더의 프린스턴신학교 재임기간은 39년이었고 그의 영향은 신학교 전반에 걸쳐 넓고도 깊이 있게 퍼졌다. 그는 프린스턴에서 교수로 사역하면서 몇 가지를 강조했다.

 

먼저 그는 목회적 경건(pastoral piety)을 우선적으로 강조했다.

 

아치볼드 알렉산더 교수가 처음에는 신학교 모든 과목을 가르쳤지만 다른 교수진이 추가되면서 결국 목회신학(pastoral theology)에 집중했다. 아치볼더 알렉산더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를 체험했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역자들을 훈련시키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만이 은혜를 전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학문적으로 연구한 것으로만은 안 된다는 말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음이 따뜻한 사람만이 그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수 있다. 영혼을 살피는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부드러운 동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져야한다. 목사는 기도에 능한 사람이어야 하고 자신의 직분에 대한 막중한 책임과 깊은 소명감이 있어야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만이 그 직무를 끝까지 잘 감당할 수 있다” (Archibald Alexander, “On the Advantages of Eminent Piety to a Minister of the Gospel” lecture, Princeton Seminary, Princeton, New Jersey, 1814).

알렉산더는 교리적 지식의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언제나 교리의 목적은 더 큰 사랑과 더욱 큰 거룩함을 이루는데 있었다. 

그는 건전한 교리적 요소가 결여된 감정적 설교를 의심했지만 동시에 그는 감정이 결여된 단순한 교리적 설교도 의심했다. 알렉산더는 학생들에게 교리와 감성, 이 두 가지를 항상 함께 유지하도록 촉구했다.

 

또한 그는 회심의 체험의 다양성을 높이 평가했다.

 

알렉산더는 10대였을 때에 회심을 체험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자기의 신앙의 감정적 체험의 모습이 달랐기 때문에 열등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중에 목사가 되고 성경을 연구할수록 그는 사람들이 회심의 체험의 다양한 방식이 존재함을 알았다.

알렉산더의 유명한 책 “종교적 체험(Thoughts on Religious Experience)”에서 그는 회심경험의 통일성과 다양성(unity and diversity)이 있음을 묘사했다.

복음전파를 통해 성령께서 친히 사람들 심령 속에서 역사하셔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시간이 더 걸리고 어떤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더욱 크게 나타나고 혹은 다른 사람들은 거의 감정적인 모습이 나타나지 아니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회심의 시간을 알 수 있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은 회심이 구체적으로 언제 일어났는지 모를 수 있다.    

알렉산더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체험을 통해 회심을 체험하게도 하시지만 또한 어떤 사람들은 유아기부터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믿음으로 자라나게 하신다고 했다(일반적으로 기독교가정에서 자라나는 유아세례 교인들).

 

그리고 알렉산더는 젊은 목사들을 멘토링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의 제자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은 찰스 하지(Charles Hodge)이다. 찰스 하지는 스승 알렉산더보다 더욱 큰 인물이 되었다. 찰스 하지는 스승 아치볼드 알렉산드를 너무나 존경하여 자기 아들의 이름을 아치볼드로 알렉산더 하지(Archibald Alexander Hodge)로 지었다. 일반적으로 A.A. 하지로 알려져 있다. 

찰스 하지는 알렉산더가 1812년 프린스턴으로 이사했을 때 처음 만났고, 하지는 지역학교의 십대 청소년이었다. 찰스 하지는 아버지 없이 자랐으며 알렉산더는 하지를 자기가 데리고 키우고 양육했다. 찰스 하지는 알렉산더의 전도여행에 함께 다녔다. 

나중에 알렉산더는 찰스 하지를 프린스턴신학교에 교수로 임명했다. 찰스 하지가 신학교 교수가 된 후 첫 강의제목이 “성경해석에서 경건의 중요성”(The Importance of Piety in the Interpretation of Scripture)이었는데, 이것은 찰스 하지가 알렉산더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문제에 대해 완전히 동의하지는 아니했다. 알렉산더는 하지보다 부흥을 더 쉽게 수용했고, 하지는 알렉산더보다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더 많이 수용했다. 하지는 유럽에서 공부하는 것이 그의 미래사역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알렉산더는 그것이 그의 영혼에 가장 큰 위험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찰스 하지가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알렉산더가 하지에게 끼친 영향 때문이다. 알렉산더의 이름은 찰스 하지와 워필드(B.B. Warfield)보다 덜 유명하지만 알렉산더의 리더십과 그의 신학과 그의 열정은 프린스턴신학교의 제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KHL0206@gmail.com

02.12.2022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