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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개혁주의신학의 역사 (4)

찰스 하지(Charles Hodge, 1797-1878)
이길호 목사

(뉴욕 성실장로교회)

찰스 하지는 원죄교리의 직접전가론 주장하며 정통 개혁주의신학 방어

         제 1차 대각성운동-조나단 에드워드, 직접전가론 

         제 2차 대각성운동-찰스 피니, 간접전가론

 

찰스 하지는 프린스턴신학교에서 1822년부터 그가 죽기까지(1878) 50년 넘게 가르쳤다. 찰스 하지에게 신학을 배운 학생들은 3천명이 넘는다. 

찰스 하지의 신학은 당시 전통적 개혁신학에서 수정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신학파(New School) 학자들과의 길고 끊임없는 투쟁 속에 전통적 칼빈주의 개혁주의신학을 방어하면서 그의 신학이 세워졌다.  

구학파(Old School)의 핵심 지도자는 프린스턴의 찰스 하지이며, 신학파(New School)의 지도자들은 예일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회중교회의 뉴잉글랜드 신학(New England Theology)자들이다.

당시 프린스턴신학교에서는 라틴어로 된 프란시스 튜렌틴(Francis Turretini)의 “변증신학 강요”(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를 교과서로 사용했는데, 이 책을 대체하는 조직신학 교과서가 바로 그 유명한 찰스 하지의 “조직신학” 세 권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찰스 하지의 신학이 프린스턴신학(구 프린스턴신학)의 정체성을 만들어내었다. 그야말로 초기의 프린스턴신학은 찰스 하지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었다. 찰스 하지의 조직신학은 한국의 박형룡 박사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한국장로교 교회의 기초가 개혁주의신학이 되어지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19세기 미국의 영적 상황은 매우 침체되어 있었다. 18세기의 영적 대각성 운동의 열기는 모두 식어져 버렸고, 유럽의 계몽주의 사상들이 미국교회에 파도처럼 밀려들어왔고, 찰스 하지는 이 계몽주의사상이 교회와 신학에 침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19세기 뉴잉글랜드 회중교회의 신학파(New School)는 정통적인 칼빈주의 개혁신학에서 점점 멀어졌고, 동시에 보스턴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퍼져나가는 유니테리언신학과 또한 예일대학 중심으로 발전되어 나가는 뉴잉글랜드신학의 리더인 나다니엘 테일러(Nathaniel William Taylor)의 테일러리즘(Taylorism)을 비판하면서 찰스 하지는 열심히 칼빈주의 정통 개혁주의신학을 변증했다.

미국의 뉴잉글랜드 회중교회들은 자유주의로 급속히 나아가고 있었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1805년 유니테리언 신학자 헨리 웨어(Unitarian Henry Ware, 1764–1845)가 하버드대학의 신학과 과장에 임명되었다. 하버드대학 신학과는 유니테리언신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에 반대하여 1817년 앤도버 신학교(Andover Theological Seminary)가 세워져 정통신학에 근거한 회중교회 목사들을 양성했다(그러나 나중에 앤도버신학교가 앤도버뉴튼신학교가 되었고 Andover Newton Theological School 역시 자유주의 신학으로 흘러갔으며 2017년부터는 엔도버뉴튼신학교는 예일신학대학에 부속되었고 이제는 정통 칼빈주의 개혁주의 신학과는 무관한 현대신학을 가르친다).    

예일대학의 나다나엘 W. 테일러(Nathaniel William Taylor, 1786–1858)는 대각성운동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을 가졌다. 그가 예일대학에서 공부할 때에 부흥주의자 티모티 드와이트(Timothy Dwight, 조나단 에드워드의 외손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뉴잉글랜드신학의 지도자인 나다나엘 테일러는 인간의 타락교리를 후퇴시켰고 인간의 본질에 대해 정통적 개혁주의 교리를 매우 약하게 만들었다. 

원죄(Original Sin)교리에 대한 테일러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지만 그러나 아담의 죄가 전가(Imputation of Adam’s sin)되어 죄인이 된 것은 아니다. 아담의 후손들이 죄인이 된 것은 자기가 범죄해서 죄인이 된 것이지 아담의 죄 때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테일러는 인간의 원죄, 즉 아담으로부터 직접적인 죄의 전가(immediate imputation)를 부인했고 간접적 전가(mediate imputation)를 주장했다.

간접전가론은 아담의 죄에 대한 죄책감은 아담으로부터 유전적으로 그 부패함을 물려받았다고 주장한다(Being mediated through that corruption of nature inherited from Adam). 직접전가론은 아담의 죄의 전가가 본성의 부패에 선행하며 전가된 죄책이 원인이 되어 부패가 뒤따른다고 주장한다(The imputation of Adam’s sin precedes corruption of nature and is reckoned to be its cause). 그러나 간접전가의 교리는 아담의 죄의 전가가 유전적 타락에 뒤따르고 유전적 전가의 결과로 타락이 나타난다고 주장한다(The imputation of Adam’s sin follows hereditary depravity and is its effect).

많은 학자들은 테일러를 비롯한 예일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뉴헤이븐(뉴잉글랜드신학) 신학자들이 아담의 죄의 간접적 전가교리를 주장한 것은 조나단 에드워드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조나단 에드워드가 간접적 전가론을 가르쳤다는 말이다.

그러나 조나단 에드워드의 신학을 전체적으로 연구해보면 조나단 에드워드는 아담의 죄의 간접적 전가를 가르치지 아니했고 그의 입장은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에 직접적으로 전가되는 교리를 가르쳤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표현 가운데 간접 전가론(mediate Imputation)을 의미하는 “peccatum alienum” or the problem of an “alien guilt”을 문구가 있다. 이 문구는 조나단 에드워드의 “원죄론(Edwards’ treatise on Original Sin)의 제목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항은 조나단 에드워드의 원죄교리는 매우 종합이라는 사실이다. 에드워드는 원죄를 반대하는 여러 가지 주장들에 대하여 혁신적인 이론들을 사용하여 원죄의 구성요소들을 설명하면서 원죄론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고 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원죄론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굳게 정통 칼빈주의 입장에 서 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아담 안에서 인간의 연대성(The Solidarity of Mankind in Adam), 혹은 통일성 (the unity of man)을 주장한다. 아담이 범죄할 때에 아담 안에서(in Adam) 전 인류(후손)가 함께 범죄했다는 사상이다. 이와 같이 에드워드는 실재론(Realism)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학 전체를 보면 하나님의 언약의 통일성(unity)을 가르쳤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아담의 죄가 후손들에게 전가되어지는 개념은 상당히 언약적(대표성의 원리)으로 설명되어진다. 실재론 혹은 언약(대표적)의 원리는 모두 아담의 죄가 후손들에게 전가되는 간접적이 아니라 직접적 전가론이다. 

에드워즈는 그의 책 “원죄론”에 의하면 “뿌리와 가지는 하나이며…이 하나됨으로 인해 모든 가지를 통해…뿌리의 변화와 공존한다. 결과적으로 아담의 후손들의 마음에는 악한 성품이 있는데 이것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었을 때 이미 그 후손들의 마음은 아담이 품은 것과 같은 것이다”(root and branches being one…that by virtue of this oneness, answerable changes of effects through all the branches coexist with the changes in the root: consequently an evil disposition exists in the hearts of Adam’s posterity, equivalent to that which was exerted in his own heart, when he eat [sic] the forbidden fruit). 

존 머리(John Murray)는 그의 책 “The Imputation of Adam’s Sin”에서 아담의 죄가 그의 후손들에게 직접 전가됨을 변증하기 위해 로마서 5:12-21을 주해하면서 조나단 에드워드의 입장을 지지했다. 

“본성의 부패(depravity of nature) 혹은 에드워드가 칭하는 “악한 성품의 첫 번째 존재”(first existing of an evil disposition)는 “전가의 결과”가 아니라 전가 자체의 본질적인 요소이다(not a consequence of imputation but an essential ingredient of the imputation itself).

그러나 테일러는 조나단 에드워드가 주장하는 아담의 죄의 후손들에게 직접 전가되는 입장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분명한 것은 조나단 에드워드와는 전혀 다른 사상을 가졌다. 테일러는 아담의 죄의 간접적 전가를 가르침으로 이미 전통적인 칼빈주의에서 많이 떠났다. 이러한 입장은 당시 신학파(New School)와 예일의 입장이었다. 

당시 프린스턴신학교의 찰스 하지는 이러한 테일러의 신학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소위 말하는 제2 대각성운동의 리더인 찰스 피니(Charles Finney)는 신학파(NewSchool) 장로교 목사인데 그의 인간관은 나다니엘 테일러의 신학과 비슷하다. 테일러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정통적인 칼빈주의에서 많이 벗어나, 사람들은 모두 자유의지를 자기고 있고 자기의 의지로 구원을 선택할 수 있다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러한 테일러의 인간론은 부흥사 찰스 피니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조나단 에드워드의 중심으로 일어난 제1차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과는 큰 차이가 있다. 조나단 에드워드 중심의 제 1차 대각성운동은 전통적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기반에서 일어난 대각성운동인데 그들은 부흥은 인간의 노력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찰스 피니의 중심으로 한 2차 부흥운동은 상당히 인간의 의지 중심의 알미니안적인 부흥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찰스 피니는 신자가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음으로 "성령의 두 번째 축복"(second blessing of the Holy Spirit)을 받고 더 높은 수준의 성화인 그리스도인 완전(Christian Perfect)에 이를 수 있다는 교리인 완벽주의(Perfectionism)의 옹호자였다. 찰스 피니는 구원받은 성도들도 타락하여 구원을 잃을 수 있다고 믿었다.

당시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찰스 하지 밑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벤자민 워필드는 그의 책 “완전주의(Perfectionism)”에서 “찰스 피니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이 제거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찰스 피니의 신학과 제2 대각성운동을 비판하였고, 그의 스승인 찰스 하지는 부흥사 찰스 피니와 그의 신학적인 지도자인 나다니엘 테일러의 신학을 비판하면서 정통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방어하면서 보존하였다. 

찰스 하지와 프린스턴 신학자들은 이러한 뉴잉글랜드(뉴헤이븐) 신학과 찰스 피니를 중심으로 하는 제2 대각성운동과 그들의 신학적 지도자인 예일대학의 테일러를 열정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들은 테일러가 정통적 칼빈주의를 수정한 데 대해 분노를 느꼈고 나아가서 테일러의 사상 체계는 전혀 칼빈주의가 아니라 알미니안주의이며 심지어는 극단적으로 펠라기안(Pelagian)이라고 선언했다.

테일러에 의하여 주도된 뉴잉글랜드(뉴헤이븐)신학 때문에 19세기 후반부터 대부분 뉴잉글랜드의 회중교회들은 자유주의 신학으로 급격하게 나아가게 되었다.

찰스 하지는 조나단 에드워드가 프린스턴대학(당시의 이름은 프린스턴대학의 전신인 the College of New Jersey)에서 사역한지 몇 개월 되지 않지만 에드워드의 신학은 예일이 아니라 프린스턴에서 계승된다고 주장했다(조나단 에드워드의 사위인 아론 버Aaron Burr, Sr가 The College of New Jersey 학장으로 재임 중인 1757년 젊은 나이 41세에 갑자기 죽자 프린스턴대학에서는 그의 장인인 조나단 에드워드를 3대 학장으로 초빙했다. 프린스턴대학의 첫 번째 학장은 조나단 디킨슨Jonathan Dickinson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1758년 1월에 프린스턴에 도착했고 2월 16일 학장으로 취임하여 졸업반 학생들에게 집중하여 강의를 했으며 조나단 에드워드는 당시에 사람들이 천연두 예방접종을 싫어했기 때문에 자기가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기 위하여 천연두 예방주사를 맞았는데 그 부작용으로 1758년 3월 22일 사망했다. 

시간적으로 보면 조나단 에드워드는 프린스턴에 몇 개월밖에 근무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일대학은 그가 그곳에서 학업을 했고(학사, 석사), 졸업 후 예일에서 가르쳤고 에드워드의 제자들은 모두 예일대학에서 공부를 했다(예일대학교는 학교 사상 처음으로 한 사람의 저작물을 26권으로 출판하기는 처음이다. The Works of Jonathan Edwards, Yale Edition 26 vols). 지금도 조나단 에드워드에 관한 자료는 예일대학이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다.

KHL0206@gmail.com

02.2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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