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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개혁주의신학의 역사 (9)

로버트 루이스 댑니 (Robert Lewis Dabney, 1820-18
이길호 목사

(뉴욕 성실장로교회)

댑니에게 영향을 준 3가지 요인

*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문학석사 과정 * 유니언 신학교에서 샘슨 교수 * 프란시스 튜레틴 (Francis Turretin) 사상

 

   미국의 칼빈주의, 개혁주의 신학은 남장로교회에서도 매우 견고하게 확립되어져 있었다.

앞으로 미국 남장로교회 대표적인 개혁주의 신학자, 로버트 루이스 댑니 (Robert Lewis Dabney)와 제임스 헨리 돈웰 (James Henry Thornwell)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다.

   몰톤 스미스(Morton T. Smith 1923-2017)는 “하지는 개혁주의 신앙에 대해 훌륭하고 일반적인 진술을 하고 있지만, 댑니는 대부분의 주제들을 일반적으로 다루는 것 이상의 것을 진술하였다.” 

   미국 역사학회 회장을 역임한 유진 제노비스 (Eugene D. Genovese)는 "19세기 미국 남부 교회는 정치와 사회생활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지적, 도덕적으로 인상적인 사람들을 자랑했다. 그 중에서 신학자, 교수, 사회 비평가로서 로버트 루이스 댑니를 능가하는 사람은 없었다.”  

   로버트 루이스 댑니는 미국의 남 장로교회의 신학자이며, 교육자이다. 그는 유니온 신학교 (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Virginia), 텍사스 대학교 (the University of Texas), 그리고 오스틴 신학교(Austin Theological Seminary) 에서 교수로 있었다. 

   루이스 댑니에 대하여 호감을 가진 사람이건 그를 비판하던 사람이던 , 그를 알던 모든 사람들은 그를  “신학교 교수라기보다는 성경의 예언자에 더 가깝다”고  미국 미시시피 잭슨에 있는 리폼드 신학교, 신 루카스 (Sean Lucas) 교수가 말했다. 그리고  신 루카스 교수에 의하면, “댑니는 여러 면에서 19세기 미국 남부 사람들의 열정과 문화에 대표적인 사람이며, 남부의 사도로 불리웠다 (apostle of the Old South).” 

   댑니의 조직 신학 (Systematic Theology) 은 그의 사후 40년 이상 동안 유니언 신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그후에 절판되었다가 1980년대 이후부터 미국의 출판사들은  다시 출판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이 책은 미국의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 가운데 하나이다.

   바빙크와 바르트 같은 유럽의 신학자들도 미국 남장로교 신학자 댑니를 존경하였고, 프린스턴의 찰스 핫지는 댑니에게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로 와 달라고 부탁했다. 프린스턴의 위대한 신학자 워필드는 “댑니 박사는 유능한 정치가이며, 뛰어난 철학자이며, 위대한 개혁주의 신학자였고, 열정적인 그리스도인이었다” 높이 평가했다.

   댑니는 서재와 강의실에서만 활동한 신학자가 아니라,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와 같이 사회의 많은 이슈들을 다루었고 실제적으로 사회적인 이슈들을 가지고 많은 활동을 하였다. 

   댑니는 1820년 3월 5일 버지니아에서 태어났다. 댑니의 가정에는 칼빈주의와 청교도적인 근면, 검소성과 함께 남부의 귀족적인 요소와 함께 공존했다. 댑니는 어렸을때부터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을 배웠고, 부모님들로부터 칼빈주의 신앙과 삶에 대하여 많은 교훈을 받았다. 

   댑니는 버지니아에 있는 햄든-시드니 (Hamden-Sydney)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나중에 샬롯츠빌에 있는 버지니아 대학교로 편입하여 그곳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친후에 유니언 신학교 (버지니아)를 졸업했다. 

   댑니는 대학 시절 (햄든-시드니) 강력한 부흥의 은혜를 체험했고,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신앙 고백을 했다” 라고 고백했다. 댑니가 유니언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할 때 (1841년 유니언 신학교를 입학), 미국 장로교는 신학파 (New School)과 구학파 (Old School)로 나누어져 있었다. 

   구학파 지도자는 프린스턴 신학교의 찰스 핫지이었고, 그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표준으로 하는 정통적인 칼빈주의 신학을 굳건히 지켜나갔다. 신학파는 수정 칼빈주의를 채택 했고, 정통적 칼빈주의 신학을 포기했다. 이들은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알미니안주의 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당시 유럽에서 불어닥친 후기 계몽주의 (post-enlightenment) 사상을 수용했다. 신학파의 신학적인 지도자들은 주로 예일 (Yale) 출신인 사무엘 홉킨스 (Samuel Hopkins), 조셉 벨라미(Joseph Bellamy),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드 주니어(Jonathan Edwards, Jr) 등이다.  물론 이들은 모두 찰스 핫지와 댑니보다 한 시대 앞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과 신학은 그들의 후세들에게 (신학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핫지와 댑니가 활동한 19세기에는 신학파 사상이 한 세대 전보다 더욱 자유주의 신학 쪽으로 나아갔다.

   댑니가 공부한 버지니아 유니언 신학교는 당시 북부의 프린스턴 신학교와 함께 구학파 진영에 견고하게 서 있으면서 정통적인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지켜나갔다. 

   댑니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특히 프란시스 샘슨 (Francis R. Sampson) 교수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나중에 댑니는 자기에게 영향을 준 3가지 요인을 말했다. 

1)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문학석사 과정; 2) 유니언 신학교에서 샘슨 교수; 3) 프란시스 튜레틴 (Francis Turretin) 사상 (튜레틴은 17세기 제네바 칼빈주의 신학자이며, 도르트 종교회의 대표자이며 그의 책

Institutio Theologiae Elencticae 3권은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나중에 찰스 핫지의 조직신학이 출판되어 튜레틴의 책을 대체하였다). 

   1853년 33세의 나이로 댑니는 버지니아 유니언 신학교의 교수로 초빙을 받았다. 그는 햄든 시드니 대학의 학장으로, 뉴욕 Fifth Avenue Church로부터 담임목사로,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교로부터 교수로 초빙을 받았지만 그는 모두 거절하고 버지니아 유니언 신학교에 머물렀다. 댑니는 1853부터 1883년까지 30년간 유니언 신학교 교수로 있었다. 

   댑니는 문답식 (dialogue) 교수법을 사용했다. 강의하기 2일전에 칠판에 여러가지 질문들을 적어놓았다. 

이 질문들의 대부분은 그의 조직신학 책 서두에 있다. 또한 그는 학생들에게 튜레틴의 라틴어 조직신학 책을 읽도록 하였다.

   그가 유니언 신학교 교수 시절에 미국의 남북 전쟁이 일어났다 (1861-1865). 남북 전쟁의 많은 이슈들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연방 탈퇴와 노예제도 철폐 문제이었다.   

   댑니는 전쟁 직전에 같은 미국인들의 상호 피해를 막기 위해 기도와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동원 해서 전쟁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댑니는 남부 진영의 편이 되었다. 댑니는 남부의 명분은 의롭고, 북부는 “양키나라 (Yankeedom)로서 악하다고 믿었다.  

   댑니는 미국의 남부 전쟁이 뉴잉글랜드의 중앙집권주의, 북부의 노예제도 폐지론자들과 그들의 진보적인 의회주의자들은 (radical liberal Congressional hacks) 프랑스 혁명 당시의 자코뱅파의 원리 (Jacobin principles)들에 의해 진행되어졌다고 생각했다. (자코뱅파, Jacobins, Jacobin Club은 프랑스 혁명기에 생긴 정당파 중 하나인데,  주로 지롱드당과 대립하였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한 주류로, 공포 정치로  원리 원칙을 강조하는 급진파를 상징한다). 댑니는 계속해서 많은 글을 통하여 북부를 “자코뱅당” 과 연관시켜 비판했다. 댑니는 북쪽을 가리켜 말하면서, “미국의 원래 주 정부와 지방 권력을 강조한 입헌 공화국(original constitutional republic)의 구조를 허물어 버리고, 중앙 집권화된 권력을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댑니가 노예제도 폐지를 비판한 것은 인간 인권의 중요성에 대한 원리를 무시한 것이다. 노예 제도의 비도덕성은 인간 보편가치관 가운데 하나이다.

   댑니는 남북 전쟁시에 남부 연방 장군인 (Confederate general) 토마스 스톤웰 잭슨 (Thomas J. Stonewall Jackson)의 군목이면서 참모장의 역할을 했다.  

   댑니는 “버지니아와 남부를 변호함” (A Defense of Virginia and Through Her of the South)라는 글을 썼는데, 이 글을 통해서 그는 노예제도는 성경에서 죄악으로 명백하게 정죄된 것이 아니다 (not explicitly condemned by the Scriptures as sinful)라고 했다. 노예제도는 남부에서 지극히 유익한 경제적, 도덕적인 제도라고 주장했다(it had been the most beneficial economic and moral system for all concerned in the South).

   댑니의 이러한 주장은 분명하게 잘못된 진술이다. 기독교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적인 속박 뿐만 아니라, 육신적인 속박까지 풀어주어 자유함을 주는 것이며, 이것은 신약의 기본적인 윤리관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한계성이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일지라도 자기가 살고 있는 문화와 환경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는 사실이다. 댑니는 자기가 사는 남부의 전통과 남부의 문화권속에서 노예문제를 생각했고, 이에 대한 성경 해석도 매우 주관적이었다.

   1856년 남부가 패배하자, 댑니는 남부에 갑자기 발생한 새로운 많은 문제들에 직면했다. 전쟁후에 미국 남부지역의 고립이 순간적으로 무너졌고, 동시에 남부 기독교의 보수주의가 붕괴되어졌다 (the breakdown of the relative isolation and conservative Christian consensus of the American South). 

   그리고 국제적으로보면, 프랑스의 정치적 급진주의 (French political radicalism), 독일의 성경고등비판 (Higher Criticism of Scriptures), 그리고 영국의 진화론 사상이 미국 남부에 크게 밀려왔다.  

   또한 전도 부흥 운동의 지도자 피니 (Charles Grandison Finney)와 무디 (D. L. Moody) 가 개발한 부흥 및 전도의 방법론들은 상당히 알미니안주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제시함보다는 인간적인 방법을 채택하였다. 

   19세기 미국 남부의 이러한 환경 속에서 댑니는 교회의 근본을 무너지게하는 세속적이며, 인본적인 사상들과 치열한 투쟁을 하면서 칼빈주의 신학과 교회를 지켰다. 

   1870년 댑니는 남장로교회 총회장이 되었고, 북장로교회와 연합을 반대했다. 그는 공공 교육에서 세속적인 것들을 배척했으며, 무디-생키 형태의 부흥운동을 반대했고, 미국 남부지역의 사회적인 모든 분야가 비기독교적인 문화를 수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글들을 많이 썼고, 설교와 강연을 하면서 정통적인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사수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남부의 지도자들은 댑니의 주장을 별로 좋아하지 아니하였고, 댑니는 그 사회에서 고립되어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사람들은 댑니를 논쟁만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cantankerous) 별명을 붙였다.

   댑니는 정통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온갖 종류의 도전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인 참으로 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마치 구약의 엘리야의 삶과 비슷하였다. 그리고 프린스턴 신학교가 자유주의로 향하여 기울어진 것을 막기 위해 열정을 다해 신앙을 사수한 메이쳔 교수와 매우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메이쳔은 댑니보다 한 세대 이후의 일이었다. 교회와 진리를 허무는 세상의 온갖 종류의 도전으로부터 개혁주의 신학을 사수하고 지켜나가기는 매우 어렵지만, 그것을 양보하고 포기하는 것은 한 순간이다.

   댑니는 자기가 오랫동안 교수 생활을 해온 버지니아 유니언 신학교에서도 자기의 영향력이 사라지고 있었고, 학교에서도 댑니가 제안한 신학교의 미래를 위한 제안들을 거부하였다. 

   댑니는 정신적으로 많은 좌절감을 가지고, 오스틴의 텍사스 대학교 University of Texas in Austin) 에서 도덕 철학 (Moral Philosophy) 교수로 청빙을 받고 수락하였다. 그는 오스틴에서 오스틴 신학교를 세웠고, 사회학, 정치학, 철학, 경제학 등 다양한 분야의 글들을 썼다. 1894년 댑니는 텍사스 대학교를 사직하고, 1898년 사망하기 전까지 설교와 강의와 집필을 계속했으며, 이 시기에 속죄 (The Atonement)와 실천 철학 (The Practical Philosophy)라는 중요한 책이 출판되었다. 

   댑니는 19세기 미국의 남장로교회에서 전통적인 칼빈주의 개혁신학을 든든히 세운 참으로 귀한 하나님나라의 종이었다. 

참고한 자료들: Thomas Cary Johnson, In Memoriam: R. L. Dabney; The Life and Letters of Robert Lewis Dabney; Sean Lucas, Robert Lewis Dabney:  A Southern Presbyterian Life; 

Dabney, Systematic Theology; Sensualistic Philosophy; The Practical Philosophy; 

David F. Wells edited, Reformed Theology in America.

KHL0206@gmail.com

05.14.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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