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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부터 삶에 동기부여를 받는가?

이사야 40:28-31
한일철 목사

(그린스보로한인장로교회, NC)

오늘날 한국에서 많은 젊은 청년들이 희망과 꿈도 없이 매일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희망을 가질 동기부여가 사라진 것이기에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책을 보니 젊은이들 중에 한국에 제 14대 대통령이었던 김영삼 대통령 기록 전시관에 가서 큰 희망을 발견한다고 합니다. 기록전시관에는 김영삼 대통령의 대학 성적표가 붙어 있는데, 4년 동안 A는 두 개 밖에 없고 온통 B, C, D로 채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 곳에 방문했던 젊은 청년들이 김영삼 대통령의 그 초라한 성적표로 인해 큰 희망을 갖는 동기부여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성적이 좋지 않은 분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수 있었으니 기록전시관을 방문한 젊은 청년들의 마음에는 ‘내가 못할게 뭐있어, 나도 할 수 있어’라는 삶에 희망의 동기부여가 된 것입니다.

때론 다른 이들의 실패를 통한 성공이 나로 하여금 동기부여를 주어 세상을 살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를 딛고 일어선 나의 스토리가 다른 이들에게 삶에 동기부여를 줄 수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가 소망을 품고 힘차게 살아가게 하는 동기부여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통해 매일 희망을 품고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하나님의 능력이 실제로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에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힘의 공급을 받고 살아가고 있나요? 이사야 선지자가 살았던 시대는 매우 혼탁한 시대였습니다. 남조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살던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참으시고 그들이 죄에서부터 돌아오길 기다리고 계셨지만, 그들은 그런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고 더 멀리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들의 죄악의 징계로 하나님은 남조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을 이사야로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소망이 아닌 절망이 뒤덮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삶은 피곤하며 곤비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비록 바벨론 제국에 멸망당하고 포로로 잡혀간다 해도 70년이 차면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을 돌아오게 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이어가는 회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하나님께 원망하며 질문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사 40:27).  하나님은 먼저 그 분의 능력과 우리 연약한 인간을 대조시켜 말씀하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절대로 피곤하거나 곤비하지 않으시고 능력이 많으신 분임을 가르치십니다. “너는 알지 못하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사 40:28).  하나님께서 인간과 비교하여 사용하신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곤비하지 않으시고, 피곤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고, 능력이 무한하신다는 단어입니다. 반면에 다음 구절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과 달리 피곤하고 곤비하고 무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문제가 하나도 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곤비하지 않으시고 피곤하지 않으시고,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연약한 자에게 새 힘을 공급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 40:29)

사람들은 저마다 곤비하고 피곤한 인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곤비’하다란 뜻은 ‘힘에 부치도록 심한 노동을 한 결과 기진맥진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큰 일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작은 일에서조차 쉽게 넘어집니다. 쉽게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믿음으로 너끈히 이길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너무나 쉽게 상처를 받고 힘들어 합니다. 마치 날지 못하고 죽어가는 독수리처럼 말입니다.

어느날 짧은 영상을 보았습니다. 농약에 중독되어 날지도 못하던 독수리 네 마리를 충남 서산에서 발견한 후, 치료하고 날수 있도록 훈련을 시켜 야생으로 돌려보내는 뉴스였습니다. 구조될 때에 독수리들은 날지도 못하고, 사람들을 경계했으며 그냥 그러다가 죽을 처지에 놓여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독수리들을 구조하여 끊임없이 돌보아주고, 치료하여 날수 있도록 훈련을 계속하였습니다. 구조대는 그 독수리들이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판단하여 날을 정하고 독수리들을 작은 케이지에 넣은 후, 들판으로 갑니다. 독수리 네 마리가 각각 갇혀 있는 작은 케이지의 문을 여니 독수리들이 성큼 뛰어 나와 곧장 큰 날개를 펴고 저 멀리 하늘로 날아 올라갑니다.

분명 그렇게 창공을 훨훨 날 수 있는 독수리인데 왜 여태껏 날지 못했을까요? 하늘의 왕자 독수리가 하늘의 창공을 날지 못했다는 것은 그들의 삶에 문제가 심각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비행하지 못했던 네 마리의 독수리와 같은 처지가 바로 이스라엘의 형편이었습니다. 또한 그 독수리들처럼 날지 못하는 것이 이 시대에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형편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지금 문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만 바라본다면 그 분의 공급으로 인해 믿음의 날개를 활짝 펴고 훨훨 날 수 있는 동기부여를 주시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시대에 큰 어려움을 겪으므로 삶을 움츠리고 사는 크리스천들에게도 힘껏 나아갈 수 있는 삶의 동기부여의 말씀을 주십니다. “여호와를 바라는 사람들은 새로운 힘을 얻을 것이다. 독수리가 날개를 치면서 솟구치듯 올라갈 것이고 아무리 달려도 지치지 않고 아무리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사 40:31 우리말설경).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새 힘을 얻거나 곤비하지 않거나 피곤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절대 아닙니다. 심한 역경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들과 주님만으로 소망 삼는 자들만이 새 힘을 얻어 곤비치 않고 피곤치 않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했던 말도 같습니다. 무엇이라고 우리에게 교훈합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영생을 허락하시기 위해 오셨던 예수님을 우린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시며 전능자시며 우리의 구원자시요, 우리 삶의 생명의 공급자가 되십니다. 그 예수님을 우린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삶에서 다시금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도님들 중에는 오래 전에 받았던 은혜로 오늘을 간신히 살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매일같이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현재를 살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작년에는 은혜 가운데 살았어도 올해는 그렇게 살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네 마리의 독수리들은 원래 창공을 훨훨 날던 독수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농약에 중독되어 큰 날개를 접고 힘없이 땅에서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독수리들이 예전에 날지 못했던 독수리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날던 독수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날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 받은 은혜로 우리는 결코 오늘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한번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예수님에게로부터 새 힘을 공급받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될 때 믿음의 날개를 펴서 힘차게 도약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2년간 로마 감옥에 갇혔으나 하나님께로부터 새 힘을 공급받은 바울은 그 옥 안에서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는 갇힌 감옥에서도 새힘을 공급받아 믿음이 충천했습니다. 네 곳에 편지를 보냈고 찾아오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옥중에서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이 주시는 힘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예수님이 해답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삶의 동기부여를 받고 힘차게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hanusa1962@gmail.com

04.13.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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