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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된 사모, 행복한 사역

7. 사모의 영성 가꾸기(4)

황순원 사모 (CMF사모사역원 원장)

사모의 기도생활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모와 기도는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도 예외는 아닙니다. 올바른 기도생활을 위해서는;

1. 기도의 대상을 잘 알아야 합니다. 크리스천의 기도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종교인들과는 다릅니다. 막연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차원과는 다릅니다.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면 기도의 내용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동안 하던 기도의 내용 중에 하지 않아도 될 기도가 얼마나 많았는지 점검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는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외칩니다.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줄 애비가 어디있나 하시면서 안타깝게 아버지와 우리와의 관계를 강조하셨습니다. 실제로 이것이 믿어지는 사모들이라면 많은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어려움이 닥치게 되거나 교회에 시험거리가 생기기라도 하여 성도들이 사모를 괴롭히기라도 하면 그 즉시 하나님은 아버지의 자리에서 떠나고 만 것처럼 충격을 받거나 염려에 빠지거나 상처를 받아 심하면 불면증에 걸리기도 합니다. 말로는 아버지이지만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모들의 고충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흐려지게 됩니다. 오히려 평신도들보다 사모들의 아버지는 더 강하고 힘이 있어 모든 것을 헤쳐 나오게 하시는 능력자이셔야 할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사모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아버지는 전능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이 더디 이루어질 때 마음에 의심이 생겨 사라의 말을 듣고 이스마엘을 만들었습니다. 그 후 13년 동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13년 만에 다시금 아브라함을 찾아가신 하나님은 처음 말씀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온전하라(창17:1)고 하십니다. 그 전능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아무리 전능하시더라도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랑도 보통 사랑을 하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의 목숨을 대신하면서까지 사랑하신 우리입니다. 그 분이 우리가 원하는 기도소리를 어찌 무시하겠습니까? 기도할 수 있는 근거는 우리의 공로도 아니고 우리의 의로움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소리를 듣고는 견딜 수 없어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아들의 권세를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사모들 중에는 각종 유형이 있습니다. 은사도 다르고 기질도 다르고 부름에 응하는 태도도 다릅니다. 성장과정도 다르고 섬기는 대상도 다릅니다. 다 같은 목사 남편이지만 각각 상황과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도 다릅니다. 한국초대교회 시절에 사모는 무조건 이래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각각 은사대로 교회 안에서 일하는 형태도 다르고 사모들의 은사가 개발되어 사용할 수 있는 교회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거기에 따라서 남편목사들의 시야도 많이 넓어져서 사모를 교회 안에 가둬두지 않고 은사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목사들도 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사모의 위치를 확립해주어 나름대로 교회의 일원으로 자리매김 하는 현명한 목사들도 있습니다. 이제는 사모들이 숨을 맘대로 쉴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사모들의 은사가 개발되어 활동하므로 하나님나라가 확장되는데 귀하게 쓰임받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아닐까요? 그러나 무엇이든지 어떤 일이든지 이 모든 것은 기도 없이는 할 수 없습니다. 사모들의 약점이 드러나기만 하면 기회를 타서 마귀는 엄습해옵니다. 네까짓게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라고...그런 짓을 하면서도 뭐가 그렇게도 잘났다고... 남편의 허물하나 용서하지 못하면서... 그런 성도 하나 품지 못하면서 무슨 사모라고? 마귀는 쉴새없이 사모들의 기도 힘을 앗아가려고 합니다. 성도들의 입방아에 조금이라도 오르내리기라도 하면 그동안 그렇게도 담대하고 당당하던 사모의 자세는 어디로 가버리고 나약한 모습으로 나는 더 이상 사모는 아니야 하면서 사명까지 내려놓게도 됩니다.

여기에 남편목사들의 협조가 적극 필요합니다. “어느 누가 뭐라해도 당신은 나의 돕는 배필이야” 하면서 힘을 돋아주는 남편이 있는가 하면 “당신 때문에 더 이상 목회를 할 수 없어. 아무개 목사사모 좀 봐. 당신은 엎드려 기도나 해. 기도도 하지 않으면서 누구 탓만 하고 그래” 하는 남편이라면 당장 사모는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또 사모들이 가장 힘이 빠질 때가 언제인가 묻는다면 성도들이 목사님을 향해 불평을 해올 때입니다. 고칠 수 없는 남편의 약점이 드러날 때 사모들은 남편의 약점을 보완해주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주일 전 토요일부터 남편에게 일러줍니다. “여보, 내일은 정말 조심하세요. 설교할 때 한쪽만 눈을 돌리지 마세요. 아무개 성도가 오해하고 있잖아요” 등등. 그러나 남편들은 조금은 흉내 내다가도 잘 고쳐지지 않습니다. 이런 때 사모들은 아들의 권세를 사용하기 힘들어 합니다. “잘하지도 못하는데 뭐. 성도들이 불평하는데 어떻게... ” 우리가 하는 일들의 결과를 바라본 후에 잘되면 아들의 권세를 사용할 힘이 생깁니다. 반면에 실수라도 하면 귀가 푹 늘어지고 힘이 빠지게 되면서 아들의 권세는 말도 꺼내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모들이 이 범주에서 사역하다가 지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아들의 권세는 그런 것이 아니라 행위와 단점과 상관없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 바로 자녀되는 권세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아들은 아버지를 알긴 했지만 집을 나가 아들의 권세를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기억하고 다시 돌아와 자신의 한 일과는 상관없이 아버지의 긍휼을 입어 다시금 아들의 권세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있는 큰 아들은 아버지와 늘 함께 있었으면서도 아버지의 아들의 권세를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종과 같이 살았습니다. 자신의 행한 일을 보고 삯을 바랐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자신의 행위에 달려있는 줄 착각했던 맏아들은 기쁜 잔치에 참석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모의 길을 간다는 것은 무슨 일을 많이 하여야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의 권세 값을 예수님의 피로 대신 치르고 얻은 아들의 권세를 많이 누리고 사용하는 사모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기쁨의 잔치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사모들을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아아 ! 행복한 사모들의 즐거움이여....” ▲이메일:hwangsunwon@gmail.com www.godfam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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