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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 가진 신앙인들의 결단 “대한독립만세!”

①3.1운동정신으로 풀어본 한일 무역전쟁과 대안

2019년 8월 15일 광복절을 앞두고 한국에서는 일본 정부의 잇따른 경제 보복조치에 반일운동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 일반 시민 뿐 아니라 여러 지방자치단체도 자매도시와 교류를 끊는 등 반일 운동에 나서고 있다. 현 상황을 ‘기해왜란(己亥倭亂)’으로 규정하고 일본에 맞서겠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일부 시민은 ‘신 독립군’을 자처하며 분노를 표출한다. 시민들의 분노는 일본 정부가 지난 2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안보상 수출심사 우대국가) 명단에서 제외하며 격화됐다. 일본 여행 자체와 일본 상품 불매운동처럼 경제 분야에 한정되던 반일 운동은 이제 사회·문화 영역으로 확장되는 모습이다. 한마디로, 독립 운동을 못했지만 불매 운동에는 동참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언론 보도나 SNS, 유트브를 통해 선명하게 투영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강렬한 분노의 바탕에는 과거사에서 비롯된 정서가 있다고 분석한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을 제 손으로 이루지 못했던 과거의 기억이 반일 감정으로 표출되고 있다”,   “‘기해왜란’과 ‘신 독립군’ 같은 단어는 시민들이 일본의 경제 제재를 국가 간 전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는 분석과 함께 “반일 운동은 광복절 이후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을 정도다. 

본지는 광복절 74주년을 맞아 특집으로 ①3.1운동 정신으로 풀어본 한일 무역전쟁과 대안 ②세계 언론이 보는 지금의 일본 ③크리스천이자 존경받는 일본인 학자가 일본 대신 전하는 참회록을 차례로 싣는다(편집자 주).

우리 이민자들에게는 두고 온 “모국”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이다. 그런데 가장 가깝지만 가장 먼 나라인 일본과 전면적인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다. 표면상으로는 바짝 일본 턱밑까지 쫒아온 한국에 대한 경제 압박처럼 보이지만, 한일관계 악화의 근본 원인은 아직도 과거의 식민지 지배라는 역사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강제징용 문제도 위안부 문제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해결됐다는 의견이 강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도 많은 피해자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은 채 치유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강경 우익 세력을 등에 업은 아베 정권은 아예 연속적으로 대놓고 불난 집에 기름을 들어다 붓고 있다. 

생생하게 그러면서도 객관적으로 지금 한국에서 시민들을 중심으로 산불처럼 번지고 있는 일본산 불매운동 상황을 보도한 뉴스가 있다(https://youtu.be/t-iRXtDW3bo). ‘살아있는 갈대들의 묵직한 전쟁'이란 제하로, 손석희 앵커는 한국인들의 일본 여행 취소 증가, 텅빈 유니클로 의류 매장 그리고 팔리지 않는 일본산 맥주로 상징되는 “NO More 일본, NO 아베”라는 운동이 살아있는 갈대와 같은 여의도 정치와는 상관없는 보통 한국인들이 벌이는 묵직한 전쟁이라고 브리핑해준다.

국운이 다해 한일합방으로 가는 길목인 1907년, 살아있는 갈대들은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다. 일본은 대한제국에게 차관을 제공해 한국의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고자 획책했기 때문이다. 3년 동안 이 운동은 상공인과 지식인부터 백정과 걸인, 기생, 심지어 도적까지 온 민초들이 나서서 나라 빚 1300만원을 갚기 위해 힘을 모았다(발기인 등 지도자들이 크리스천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주도면밀한 방해공작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운동은 1997년 IMF구제금융이라는 위기상황 때 경제적 주권을 지키기 위해 '금모으기 운동'의 정신적 바탕이 됐으며, 갈대들이 펼쳤던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얼마 남지 않은 8.15 광복절을 맞아 살아있는 갈대들은 서울 광화문 광장을 필두로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반일 촛불운동을 벌일 예정이다. 이러한 한국의 묵직한 행보를 보면서 선명하게 오버랩 되는 사건이 있다. 바로 3.1운동이다.

"대한독립만세!"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한반도 전역을 울렸던 이 함성은 '세계'를 향한 한민족의 하나 된 외침이었다. 한민족이 앞장서 '행동'함으로써 제국주의에 신음하던 아시아·아프리카 식민지의 각 민족을 자각시켜 함께 전 세계적 독립운동을 끌어가자는 외교적 호소였다. 

강대국의 이권 다툼이 판치던 당시 국제질서는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자격을 얻었던 일본 편이었다. 그러나 그 기고만장하던 일본이 두려워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국제사회의 여론을 움직이는 외신 보도였다. 당시 일본은 3.1운동 초기 보도통제와 '프레임 조작'으로 관련 보도를 막는 데 그야말로 전력투구했다. 하지만 시간문제지, 진실을 감출 순 없었다.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중국 상하이로부터 시작해 미국 샌프란시스코, 뉴욕, 워싱턴DC에 이어 영국 런던,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로마, 러시아 모스크바, 브라질 상파울루, 싱가포르로 3·1운동 소식은 요원의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길지 않은 기사도 많았지만 이에 자극받은 각 식민지 국가에서는 앞다퉈 독립선언문이 나오면서 민족적 독립운동이 촉발됐다. 비록 한민족이 '자립'(自立)에는 실패했지만 외신의 창을 통해 민족자결과 독립에 대한 세계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3.1운동 100주년 특별기획 취재, “그 날 그 함성…통제·조작의 '프레임' 뚫고 세계로”, 연합뉴스).

한편 3.1운동 당시 한국교회는 지금과 무엇이 달라서 큰 사회적 영향력을 미치고 사회적 존경을 받았는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한다. 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당시의 신앙은 사사화(私事化) 되지 않고 공공성(公共性)을 띠고 있었다. 나라와 민족과 교회를 먼저 생각하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에 대한 의무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민족 공공(公共)의 선(善)을 위해서는 타 교파는 물론 타종교인과도 연대하고 협력했다.”

한국 기독교인은 이 운동에 신앙적 결단으로 자발적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동자로 나서고 지도력을 제공했으며, 운동 확산의 조직을 제공하고, 통로가 돼 큰 기여를 했고 그렇게 큰 기여를 한 만큼 일제의 탄압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한국에 복음을 전파한 선교사들은 교회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게 하기 위해 ‘정교분리의 원칙’을 내세워 기독교인들이 민족운동에 가담하는 것을 철저히 막았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현실에 참여하는 것은 신앙적인 행위가 아닌 것으로 잘못 생각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그 시대의 역사적 과제 해결에 무관심하거나 회피하는 것은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가 아님을 아는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거의 모두가 신앙적인 결단에 의해서 참여했다는 것이다.

일제 헌병대가 조사한 1919년 말까지 3.1운동 관계 피검자 종교별 상황에 따르면, 종교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가장 많아 3,426명으로 비종교인까지 포함한 총 피검자 19,525명의 17.6%를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총인구의 1.5%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기독교인이 3.1운동과 관련된 피검자의 17.6%를 차지하고 이들 대부분 과격행위자이기보다는 시위주동자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3.1운동에서 기독교의 역할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당시 1.5%의 기독교 인구가 20% 이상 역할을 감당한 것이 바로 3.1운동이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과 맞물려 주목받아야만 하는 대목이 있다. 바로 당시 기독교인만의 독특한 3.1운동 방법이다. 그것은  "억압자 일본인에 대한 적대와 폭력을 자제하고, 기도와 금식으로 하나님께 의지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도덕적 우위를 유지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독립할 것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말자는 것"이었다. "(요일별) 말씀과 기도를 통한 3.1운동 참여는 기독교인의 독특한 것으로, 고난 중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기독교인들이 3.1운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동력이 됐다.“ 

기독교인들이 "3.1운동을 계획하고 적극 참여한 것은 권익 신장이나 권력의 헤게모니를 잡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순수하게 민족을 위해 선두에 서서 자신을 희생하고 일제에 항거했던 것"이었다. 3.1운동 당시의 한국교회의 신앙은 오늘날의 한국교회처럼 개인화되지 않고 공공성을 띄었던 것이며, 복음과 정의를 위한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진정한 축복으로 여긴 것이다.

마지막으로, 숭실대 기독교학과 김영안 명예교수는 “3·1운동과 한국교회, 개혁신학적 성찰”이란 글에서 “일본이 우경화하고 현명하지 않다고 야단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시기야말로 일본을 설득하는 게 중요하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3·1운동 정신이라는 것이다. 한·일 관계가 계속 악화하는 상황에서 2019년 2월 6일에 일본의 지식인 226명이 3·1독립운동 정신을 바탕으로 양국이 화해하고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협력할 것을 권고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도쿄대 명예교수 와다 하루키를 비롯한 일본 지식인들은 일본 국회에서 발표한 성명에서 "올해는 3·1독립선언이 발표된 지 100주년이 되는 기념비적인 해"라며 "(한국인들은) 일본에 병합돼 36년간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일본을 위해서라도 조선이 독립해야 한다고 설득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이 성명에서 "(지금은) 조선 민족의 위대한 설득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동북아 평화를 위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바탕으로 일·한, 일·북 간의 상호 이해와 협력의 길로 나아가야 할 때"라는 입장을 밝혔다. 

또 일본인들을 모두 군국주의자라고 몰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다. 일본에는 양심 지식인들과 2차 세계대전 말기에 동경대 지하실에서 군국주의 일본이 패망하기를 기도하는 독실한 기독교인 교수들과 학생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하마야마 유키오 일본 전 총리는 광복절 70주년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찾아와 순국선열추모비에 헌화하고 무릎을 꿇고 사죄한 적도 있었다. 존경할만하고 용기 있는 일이다. 걸림돌이 되고 있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관련해서는 문희상 국회의장이 피력한 바같이 "일본을 대표하는 총리, 혹은 퇴위한 일왕이 (사죄하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 될 것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전쟁 범죄의 주범 아들이므로 "그분이 한번 (위안부) 할머니들의 손을 잡고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한마디 하면 (위안부 문제로 인한 갈등이) 깨끗이 해소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Willy Brand)가 독일 나치의 폴란트 침공과 유대인 학살에 대해 묘소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한 것은 폴란드 국민의 마음을 풀어줘 폴란드와 독일이 다시 화해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메르겔(Angela Merkel) 독일 총리는 2015년 “나치 만행은 독일의 항구적 책임”이라고 유대인에 대한 사죄를 반복하면서 선진국의 품격을 나타냈다. 독일은 1952년부터 700억 달러 넘게 피해 유대인들에게 보상을 지급하면서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을 회피하는 일본 아베 정권과는 너무나 대조를 이루고 있다.

결론으로,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은 없다.’ 이러한 표현처럼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치유하기 힘든 증오와 분노의 감정이 숨어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문제뿐만 아니라 최근 한국의 상황을 지켜보자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는 신앙인들이 많이 있다. 기독교에는 국경이 없지만 기독교인에게는 조국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느웨 성에 가기를 싫어했던 요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12만 명보다 더 많은 일본인들이 있기에, 반드시 ‘회개’를 외쳐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가 진행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08.10.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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