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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극화세상 중심에서 “복음” 외쳐라!

CT, 에든버러대학 제임스 이글린턴 교수, 이 시대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지혜 제시

19세기를 낙관주의 시대로 보고 20세기를 전쟁과 평화의 시대로 본다면 21세기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무엇보다도 사회가 심각하고 극명하게 분열된 것을 그 특징이다.

2018년부터 지금까지는 서구 세계의 어느 (이념적) 거리 모퉁이에 가더라도 팽팽한 대립을 목격할 수 있다: 진보주의자 대(vs) 대중주의자, 밀레니엄 세대 대(vs) 베이비 붐 세대, 종교인 대(vs) 비종교인, 보수주의자 대(vs) 자유주의자, 세계주의자 대(vs) 애국주의자 등등. 분열이 우리 시대의 전유물은 물론 아니다. 인간은 항상 경쟁하는 이념들을 두고 서로 다투었다. 다만 우리 시대 분열의 특징은 이러한 차이들을 다루기 위해 기대는 정치적 담론에 있다.

오늘날 대중 민주주의는 승자와 패자를 갈라놓는 게임으로 여겨진다. 이 게임의 선수들은 우위를 차지하려는 경쟁자들이며,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 정치를 두고 논하자면, 합의를 끌어낸다거나 타협한다는 것은 과거의 것으로 보인다. 우리 크리스천들은 우리 시대가 탈-진실(post-truth)정치의 시대로 변해버렸다고 종종 비판하는데, 우리는 바로 그 똑같은 정치가 또한 탈-이웃(post-neighbor)정치가 돼버렸다는 것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영국 애든버러대학 개혁신학 석좌교수(Meldrum Lecturer in Reformed Theology) 제임스 이글린턴(James Eglinton)은 양극화 시대에서 크리스천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가야 할지를 말해준다((Who Is My Digital Neighbor?: A Christian call to reject polarizing public discourse). 

 

오늘날의 민주주의에서 승리란 승리한 쪽이, 비록 그 승리가 근소한 표차의 승리라 하더라도 “국민의 뜻”을 독점하게 되고 그들의 논리와 애국심과 진보가 곧 ‘다수’의 뜻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패배한 쪽은 곧 일종의 비국민(non-people)이 된다. 패배자들이 그들의 ‘소수’ 의견을 계속 주장하면, 그들에게는 “애국심이 없는 불평불만분자”에서 “국민의 적”까지 다양한 낙인이 찍힌다. 바로 이것이 21세기 크리스천들이 살고 있는, 움직이고 있는, 그리고 때때로는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그저 존재하는 그런 문화다. 

민주주의는, 물론 성경의 이상은 아니다. 비록 성경이 사회 정의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하고 있지만 성경은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사회를 어떤 특수한 제도에 맞춰 조직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역사적 의미에서 고대 아테네식의 민주주의는 기독교보다 약 5세기 앞선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렇다하더라도, 사회 질서의 최선의 형식이 무엇인지를 두고 벌인 논쟁들 가령 민주정치냐 군주정치냐 귀족정치냐? 등은 기독교 역사에서 거의 불변의 배경이 돼왔다.

기독교의 유구한 (정치적) 역사에는, 성경은 비록 국가에 대한 뚜렷한 청사진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유한 목소리로 모든 국가를 향해 권력자들은 정의롭게 행동해야 한다고 촉구한다는 사상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로마에서부터 칼뱅의 제네바와 현재의 워싱턴DC와 런던에 이르기까지 흐르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언제나 정치적 신앙을 갖고 있다.

오늘, 서구 기독교는 민주주의의 쉼 없는 발전에서 가장 최신의 단계, 다수 지배를 두고 벌이는 경합으로서의 대중 민주주의를 상대해야 하는 시점에 있다. 이 게임은 다수의 입장을 “국민의 뜻”으로 치환하기 때문에, 다수의 지위(선거든 사회여론이든)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게임에서 이긴다는 것은 아주 신나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이 게임 자체가 유권자에게 선택의 자유 즉 외부의 간섭 없는 투표, 곧 유권자의 독자적 입장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승리를 정말 달콤하게 만든다. 이때 유권자는 자신이 이기는 말에 돈을 걸었다는 희열을 느낀다.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라는 빅 데이터 기업과 페이스북이라는 소셜 미디어 ‘자이언트’를 집어삼킨 작년에 벌어진 스캔들이 정치 담론의 이러한 승자와 패자 낙인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바꿔버렸다. 수백만 페이스북 유저들의 개인정보가 그들의 동의 없이 수집됐고, 짐작컨대 그들을 조사하고 분류하기 위해 이용됐다. 

더 나아가, 우리의 뉴스 피드를 맞춤형 이념 에코룸으로 바꿔 놓았다. 결국, 우려하는 바는 보이지 않는 세력이 조작한 소셜 미디어가 우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투표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우리는 국민의 뜻이라는 것이 우리가 전에 확신했던 것만큼 그렇게 자유롭게 선택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고통스런 자각을 하게 됐다. 매우 음침한 어떤 실체를 우리가 자각하면서 국민의 뜻에 대한 우리의 환상이 산산이 깨졌다. 온라인에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 우리에 관한 상상불가의 정보량을 축적한 다음, 돈을 대주는 쪽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그 정보를 사용해 우리를 감언이설로 속이는 음흉한 빅 데이터 산업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실체가 드러나면서 그동안 우리가 듣고 살아온 자유의 내러티브, ‘우리는 경주의 주체(players)이다’는 전복됐다: 우리는 경주의 대상(being played)으로 전락됐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많은 크리스천들이 느끼는 직접적이고 어려운 질문은 “페이스북을 지워버려야 하나?”이다. 실제 세계에서만큼이나 온라인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형성된 세대, 소셜 미디어 원주민들(social media natives)에게 이것은 확실히 키르케고르가 말한 실존의 위기다.

사려 깊은 크리스천의 반응은 이 질문을 확장해 우리를 이 지점까지 이끈 공공 담론의 종류, 우리의 승자독식 대중 민주주의 스타일까지 검토해야 한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분파들의 관계를 다수 획득(majority dominance)을 위한 이기느냐 지느냐의 경쟁으로 쉽게 바꿔버리는 우리 시대의 성향이 막강하고 비도덕적인 빅 데이터 산업을 만들어냈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갖고 패자는 버림받는다면, 우리는 당연히 이기기 위해 모든 가용 도구를 사용할 것이다. 이러한 제로섬 현실이 정치 지도자들을 부추겨 자신의 의지를 “국민의 의지”로 바꾸기 위해 빅 데이터의 힘을 이용하게 한다.

성공회 신학자 로완 윌리엄스가 2016년에 처음 발표하고 2017년에 더욱 발전시킨 주장에서 우리는 기독교적 반응이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주장은 현대 미국 대중영합주의 정치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했고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의 영국 정치에 초점을 맞췄다, 

2016년 6월 국민투표에서 영국 유권자의 51.9%가 유럽연합을 떠나는 선택을 했을 때, 유럽연합 잔류를 지지한 많은 사람들은 타블로이드 신문들의 공개적인 조롱거리가 됐다. 잔류파 정치인들은 비애국적 인사, 반민주적 인사, 어떤 경우에는 “국민의 적”으로 조롱 받았다. 

이러한 창피주기 현상을 비판하면서 윌리엄스는 오늘의 정치가 어떻게 우리를 선동해 다른 사람들을 경쟁자로, 우리가 패배시켜야 하는 사람들로 보게 만드는지 지적했다.

이런 정치와 달리 기독교는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먼저 이웃으로 보라고 도전한다고 윌리엄스는 강조했다.

그의 주장은 민주주의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의 주장은 특히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다른 정치 담론 스타일보다 더 건강한 정치 담론 스타일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가 소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관한 핵심을 간파하는 질문을 던졌다.

예를 들어, 낙태 지지와 안락사 지지 사회에서, 이러한 쟁점들에 반대 의견을 가진 시민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지자들에 의해 어떤 취급을 받는가? 그들이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사람들로 여겨진다면, 공적 영역에서 그들의 얼굴이 배제된다면, 그리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소수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신념을 포기하라고 강요받는다면, 그런 민주주의는 허약하기 그지없다. 

전통적 결혼, 생명의 권리, 또는 종교적 자유에 대한 우리의 신념이 소수의 신념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끼면서 상대를 비난하기 전에, 우리 크리스천들은 우리가 다수일 때가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병든 민주주의에서 다수를 차지해 “국민”이 되려고 경쟁하는 이러한 병든 민주주의는 소수 역시 국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성경과 문화를 더 분명하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성경은 변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문화는 교회의 전통과 사회적 관습, 예술적 창조물의 혼합체일 뿐이다. 문화가 가질 수 있는 권위란 기껏해야 교회와 공동체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그것은 개혁 혹은 비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문화는 시대나 장소에 따라 변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아래에서 살고자 하는 크리스천이라면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문화를 성경적인 잣대로 끊임없이 비판해야 한다. 우리는 문화적 변화에 분노하거나 저항할 것이 아니라, 이런 변화가 인간의 존엄성을 더 진실하게 표현하고 우리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기 위해 급진적인 변화를 제안하고 개혁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하나님은 모두가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도록 창조세계를 만드셨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자기 마음대로 살면서 양극화, 갈등을 불러일으켰기에, 양극화의 근본에는 죄에 의거한 ‘불의’의 문제가 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정의를 행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성경 말씀은 시편 103장 6절이다.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하나님은 공정한 재판관이 되신다. 성경은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 장애인, 억눌린 자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으며 정의로 심판하시며, 갇힌 자들에게는 자유를 주시는 분(눅4:16~19)이다.

그렇기에 차별과 갈등을 비롯한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이 모든 간극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불의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나라의 오심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양극화 해소의 대안이다. 

특히 성경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10:25-37)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쫒는 크리스천의 참된 자세를 발견할 수 있다. 크리스천들이 고통 받고 소외받은 사람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바로 ‘이웃 된 삶’을 살 때 양극화의 어두운 그늘에 햇살이 비치게 된다. 

 

09.07.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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