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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은 희망이며 새로운 미래다!

부활하신 예수님 만나 진정한 사도로 변화된 베드로 통해 ‘2021년 부활

2021년 부활절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은 복잡하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복음의 메시지는 큰 기쁨의 소식이 분명하지만, 여전히 전 세계 대유행이 돼(pandemic) 인류를 위협하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종식되지 않았고 여전히 많은 교회에서 성도들이 함께 어울려 예배하는 기쁨을 나누지 못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힘든 상황에 처해 있지만, 역사상 이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도 교회공동체는 믿음을 잃지 않고 부활의 기쁨을 전파하고 다녔다. 불안정한 현실에서도 부활의 거룩한 힘과 기쁨이 그리스도의 몸인 공교회와 오늘날 세계에 강물처럼 흘러나야 한다. 역사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타자를 위한 존재로 사셨다. 보혈을 통한 대속의 희생과 죽음의 권세를 꺾은 부활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열어주셨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예수의 부활에서 존재의 변화를 경험하며 새로운 실존으로 들어간다.

부활에서 열린 하나님의 나라는 절망의 심연에서 솟구치는 희망이며 길 없는 벼랑 끝에서 이어지는 미래다. 이 거룩한 힘과 기쁨을 크리스천이 먼저 체험하고 이웃에게 삶으로 전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신앙의 논리가 아니라 신앙의 삶으로 이어져왔기 때문이다. 부활 사건을 통해 진정한 사도로 변화된  베드로 이야기는 바로 새롭게 열린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길을 제시해준다.

 

해마다 봄은 우리에게 부활을 생각하게 하며 흘러간다. 기독교 전통은 긴 겨울을 끝내고 싹이 틀 무렵 부활절을 맞아 부활과 희망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마다 상기하는 부활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이 부활이라는 주제를 생각할 때 부활의 역사성과 그 증명에만 몰두한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부활을 단지 믿음의 문제로만 다뤄, 이 중요한 주제는 죽음 이후에나 의미 있는 주제가 돼버린다. 이 극단적 두 태도 사이에서 우리가 현실 속에서 매번 새롭게 발견해야 할 부활의 의미는 상당부분 훼손되기 마련이다.

부활은 삶이고, 그렇기에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드러나야 한다. 부활은 희망이고, 그렇기에 고통의 자리에서 생각돼야 한다. 부활은 종착지이고, 그렇기에 모든 철학적 질문과 함께 성찰돼야 한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지 못해 지칠 때, 지금도 세계 곳곳에 만연한 불의와 고통을 볼 때, 우리 믿음의 대상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거의 모든 순간에 우리는 부활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부활의 개념과 의미를 탐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적용’이다.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크리스천들에게는 거창한 신학적 탐구보다는 부활을 다루는 신앙 에세이나 좋은 설교들을 통해 오늘 우리 삶에 적용되는 부활 신앙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부활의 진솔한 의미를 이해하고  삶에 적용시키려할 때, 좋은 도구가 있다. 바로 ‘소리굽쇠’다.

소리굽쇠(tuning fork)는 고유한 진동수의 음을 내기에 악기를 조율할 때, 기준음을 내는 도구로 사용되는데, 신기한 것은 소리굽쇠가 울릴 때 주변에 있는 같은 진동수의 물체는 함께 공명 현상을 일으킨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베드로의 이야기(요21:15-19)도 방향을 잃었던 베드로가 소리굽쇠의 공명 효과로 다시 그 방향을 찾는 과정을 묘사한다.

형 안드레를 통해 만난 예수가 꿈에 그리던 바로 그 메시아임을 확인한 베드로는 예수의 부르심을 좇아 갈리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일반인의 삶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나선다. 그의 인생이 주님을 향해 방향을 잡은 순간이다.

하지만 우직하고 의리 있을 뿐 아니라 충성스러울 만큼 마음이 뜨거웠던 베드로는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부인하고 만다. 

베드로는 예수와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세 번 받았고, 세 번 다 부인했다. 그리고 세 번째 부인하던 순간 예수의 예언대로, 닭이 울었다. 닭이 울었을 때,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똑바로 쳐다보셨다(눅22:61).

로마제국의 식민지 백성으로 천대받던 갈릴리 땅에서 생활하던 베드로에게 새로운 세상을 향한 꿈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삶을 추구할 만큼 절박했다. 세리와 창녀 같은 사회의 가장 작은 자를 품으시던 주님, 오천 명을 먹이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고, 풍랑조차도 다스리시며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시던 주님을 보며, 이제 정치권력만 가지면 새로운 세상이 올 줄 알았던 베드로가 메시아 운명을 운운하시며 불안하게 하시더니 결국 무기력하게 체포돼 죽을 운명에 빠진 주님을 보았을 때, 그 주님을 부인했던 심정도 이해할만하다.   

이렇게 인생길에 생기는 당연한 욕구들이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해야했기에 예수조차도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자신과 씨름해야 했다. 

빵, 권력, 기적이라는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기본 욕구들이 삶의 전부라고 악마는 속삭이며 예수로 하여금 지향하는 바를 잃게 만들기 위해 애썼지만 주님은 그 시험을 이겨내셨다. 즉, 삶의 현실적인 욕구는 우리의 삶을 이루는 당연한 내용이지만 그것이 인생의 절대적인 의미는 아니며 인생의 필요조건이 항상 충분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구상 시인은 주님의 부활로 세상에 주어진 사랑의 선물을 이렇게 그려준다:

죽어 썩은 것 같던/ 매화의 옛 등걸에/ 승리의 화관인 듯/ 꽃이 눈부시다.

당신 안에 생명을 둔 만물이/ 저렇듯 죽어도 죽지 않고/ 또다시 소생하고 변신함을 보느니/ 당신이 몸소 부활로 증거한/ 우리의 부활이야 의심할 바 있으랴!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진리는 있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정의는 이기는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달게 받는 고통은 값진 것이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믿음과 바람과 사랑은 헛되지 않으며/ 당신과 우리의 부활이 있으므로/ 우리의 삶은 허무의 수렁이 아니다.

봄의 행진이 아롱진/ 지구의 어느 변두리에서/ 나는 우리의 부활로써 성취될/ 그 날의 누리를 그리며/ 황홀에 취해 있다.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부활의 소리굽쇠로 그 사랑의 소리를 보내신다. 우리가 다 아는 바대로, 아침 식사 후 주님이 베드로에게 던진 세 번의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세 번에 걸친 주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에 사용된 “사랑한다”는 말에 해당하는 희랍어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주님이 하신 처음과 두 번째 질문에 쓰인 “아가페(agape)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와 세 번째 질문에 사용된 “필리아(philia)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이다.

하지만 베드로의 대답에 쓰인 사랑한다는 단어는 세 번 다 “필리아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였다.

세 번의 문답 이후에 주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덧붙이신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 21:18)

유세비우스 같은 초대교회의 역사가들은 베드로가 십자가에서 두 팔이 벌려진 채 죽임을 당했다고 말한다.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의 소리에 공명한 베드로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가득한 새로운 방향을 찾게 된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순교할 때까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 나간다.

부활절은 잃어버린 본래의 방향을 다시 찾아 필리아에서 아가페로, 부인에서 믿음으로, 상처에서 치유로, 실패한 제자에서 신실한 제자로 옮겨가라는 초대다. 우리 부활하신 주님이 가지신 소리굽쇠가 울려 퍼질 때 그 사랑의 소리에 공명하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초대의 말씀이, 그 사랑의 울림이 느껴지는 부활절이 돼야한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교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고전15:14).

<편집부>

03.2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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