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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절과 정부수립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 비하인드 스토리 (상)

1945년 8월 15일은 일제의 쇠사슬에서 벗어나 해방된 광복절인 동시에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이다. 8·15광복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인 미국의 승리로 우리는 값없이 얻어진 선물이었다. 그 후 군정과 공산당의 방해공작으로 혼란의 3년을 지내다가 이승만 박사의 지략과 결단으로 자유대한민국이 세워졌다. 여기서 필자는 자유대한민국을 세운 이승만을 중심으로 생각고자 한다.

 

1948년 8월 15일 뉴욕타임스 조간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톱뉴스가 나왔다(The New York Times, 1948. 8. 15. New York. Sunday). 즉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에 의해서 주권국가가 선포되었다. 국가 이름은 The Republic of Korea로 한국말로는 대한민국(Tai Han Min Kook)이라 하였다” 했고, 대한민국은 자유(Freedom)와 민주주의(Democracy)를 표방한다고 썼다. 특파원 리챠드 J. H. 존스톤은 헤드라인으로 ‘Korea Set Up Republic’이라 했고, 부재로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지 3년 만에 미군정에 종지부를 찍고 남한 단독으로 주권국가를 선포하다”라고 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일은 1948년 8월 15일이고 우남 이승만 박사는 초대 대통령이자 국부(國父)였다. 오늘의 한국의 정치권과 교육계와 역사학계는 상해 임시정부의 의미를 크게 보는 것은 좋은 일이나, 대한민국의 건국일을 부정하거나 무의미하게 만드는 듯 한 인상을 받는 것은 나뿐만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이 태어나기까지 공산주의자들이 길길이 날뛰며 얼마나 많은 파괴와 방해공작을 했는지는 역사적으로 모두 증명된 마당에 여기서 모두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최근에 학계와 정치계는 이승만이 만든 ‘대한민국’은 바로 남북 분단의 원인이라고 비판하면서, 상해 임시정부의 의미를 오늘에 되살려 ‘우리는 하나’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상해 임시정부 안에는 공산주의자와 이승만과 같은 자유민주주의 주창자들과 더불어 있었으니, 다 함께 평화공존모델로 삼을 만하다는 발상일수도 있다. 하지만 생일을 모르는 사람은 사생아라 할 수 있다. 건국일도 모르는 나라 백성은 생일을 모르는 사생아와 같다. 

3·1운동의 위대함은 세계적으로 평가 받을 것이다.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도 나라의 독립을 찾으려는 선각자들의 삶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상해 임시정부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많았고, 상해 임시정부는 실제로 대한민국의 건국과 연속성 없고, 임정 요원들은 해방 후 한참 후에 개인적으로 한 분씩 귀국했다. 김구 선생 같은 독립운동의 대표자는 좌우 합작, 통일한국을 열기 위한 그의 열정은 높이 평가하지만, 도리어 김일성에게 실컷 이용당하고 말았다. 

김구 선생은 민족주의자로서 오늘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우리는 하나’에 올인 하였다. 이승만은 김일성이 주도하는 남북협상이 실패로 돌아갈 것을 예견하고, 김구 선생을 극구 말렸으나 무위로 돌아갔다. 유엔이 1948년 2월 26일 감시가 가능하고 자유선거가 가능한 남한만이라도 자유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1948년 3월 17일 국회의원 선거법이 발표되어 5월 16일에 투표하기로 결정되었다.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자유진영이 5·10선거 준비를 하는 동안 중도좌파 세력과 김구 세력의 5·10선거 반대로 남한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총선 반대 저지를 위한 선거 업무 방해는 무장 폭동 등 다양한 투쟁으로 선거를 방해했다. 

이러한 와중에 김일성이 남파한 간첩 ‘성시백’이 내민 김일성의 초청장을 받아 쥔 김구와 김규식 등 일행이 김일성의 각본에 따라 개최되는 남북협상, 즉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러 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바로 이때에 여기저기서 공산당의 무장폭동이 일어나 남한사회는 내란에 가까운 혼란상태로 치닫고 있었다. 김구는 남북통일정부라는 이상에 함몰되어 현실에 대해서나 국제정치에 너무나 어두웠다(김현태 편,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불편한 진실, 범아출판, p.23). 

특히 김구가 월북했을 당시 북한에서는 이미 북한헌법이 제정되고, 공산정권 수립의 절차가 착착 진행되고 있음을 목격하고도, 김구 일행은 평양에서 붉은 군대의 사열까지 받았다. 김구는 이러한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국민을 기만했다. 김구를 위시한 남북협상(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파들은 김일성과의 약속에 따라 5·10선거를 철저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최근 이승만 박사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김구가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났을 때 김일성은 전쟁을 통해 대한민국을 적화통일을 시키려는 메시지를 이미 받았다. 그때 김구는 통일이 될 것을 확신하고 김일성에게 평양에 있는 큰 과수원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쾌히 승낙했었고 문서로 약속했었다. 이런 사실이 러시아 외교문서에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있던 그날, 김구는 말하기를 “비분과 실망이 있을 뿐이다. 새로운 결심과 용기를 가지고 강력한 통일운동을 추진해야 되겠다”(김현태 p.24)고 했다. 김구 선생은 위대한 독립운동가이기는 해도 철저한 민족주의자로서 남북합작, 민족통일을 염원한 나머지 결과적으로 공산당에 이용되고 말았다. 사실이 그러함에도 지금도 비판자들은 이승만을 남북분단의 책임자로 몰아 부친다. 남쪽의 공산당 박헌영의 계략과 술수로 대한민국은 하마터면 공산화 될 뻔 했으나 박헌영은 도리어 김일성에게 제거되었다. 

지난 70여 년 동안 한국의 모든 언론, 역사가들, 교육가들은 남북통일, 민족통일과 화해와 평화를 앞세워서 우남 이승만 박사에게 흠집 내기와 이승만 약점 캐기, 이승만 죽이기를 앞 다투어 해왔다. 이른바 역사를 알고 정치를 한다는 학자들과 논객들이 마치 이승만 비판을 해야 신지식인인 듯 생각해왔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에서는 모든 교과과정에서 이승만 폄하와 죽이기를 했고, 김일성이 세운 북조선 공산주의 집단만이 정통인 듯이 세뇌시켰다. 

어찌된 일인지 자유대한민국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부모도 태어난 생일도 부정하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깨어있는 학자들이 그간의 상식으로 알려졌던 이승만을 재조명하고, 우남 이승만 박사의 대한민국 국부로서 애국자요, 위대한 정치가요, 국제 외교가요, 전략가로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은 고무적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 자유대한민국은 지구상에 없었다. 또한 대한민국이 오늘의 세계 10위권의 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은 이승만 박사가 세운 자유민주주의 국가 덕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세운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 시장경제, 한미동맹이야말로 8·15광복절과 정부수립을 맞은 우리가 세계 강국으로 가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선물이었다. 

skc0727@yahoo.com

08.14.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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