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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자들은 ‘언제든 하나님께 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다!

CT, 전쟁으로 인해 “고아 목사”가 된 우크라이나 목회자/평신도들의

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많은 교회가 많은 문제들에 직면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남아 있던 일부 목회자들이 러시아군에 체포·협박·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이러한 공포스러운 이야기들이 신도들 사이에서 동요를 불러오기도 한다.

‘크리스처니티 투데이(CT)’ 글로벌 스탭 작가인 소피아 리는 우크라이나 현장에서 소위 “고아 목사”로 불리우는 남아서 사역하는 목회자들을 만나, 오늘이라도 죽을 각오로 사역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담아내고 있다(Ministers in Ukraine Are ‘Ready to Meet God at Any Moment’ : Pastors and church leaders who stayed behind serve as if every day might be their last). 

 

제임스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기도할 때마다 우크라이나의 매서운 겨울 날씨로 인해 그의 입에서는 입김이 난다. 그가 단순히 헤르손의 한 대형교회의 담임 목사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은 아니다. 기도는 그에게 생명줄이다. 러시아가 쏜 미사일에 교회 벽이 흔들릴 때도, 목사의 네 살배기 아들이 울 때 그는 쉬지 않고 큰 소리로 기도한다. 빵을 근처 마을로 가져다주기 위해 운전하기 전에도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한다. 종종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밀려올 때마다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한다.

12월의 어느 화요일 추운 아침, 제임스(가명으로 기재해달라고 요청함)는 먼지 묻은 노란 밴의 운전대를 잡고 우크라이나어로 기도했다. 그는 현지인들이 흔히 ‘섬’이라고 부르는 진흙투성이 드니프로강을 따라 인공섬으로 이어지는 다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러시아의 포격으로 그곳의 작은 교회의 창문 몇 개가 산산조각이 났고, 제임스는 합판으로 부서진 창문을 막았다.

이 섬은 빈번히 러시아의 공격을 받는다. 강 바로 건너편은 아직도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헤르손 주의 동쪽 부분이 보인다. 수만 명의 러시아군이 수도 헤르손을 탈출해 황급히 후퇴하던 지난 11월부터 매일 복수를 하듯 강 건너편에 로켓과 수류탄, 탱크포탄, 박격포 등을 투척하여 이곳에서만 매일 1명 이상이 목숨을 잃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교회 창문을 수리해야 했다. 섬의 인구는 원래 30,000여 명이 되는데 이 중 약 4분의 1 정도의 주민만이 이곳에 남아 있었다. 대부분 나이가 많거나 장애가 있어 대피하지 못했거나 이곳에 남기로 고집한 이들이다. 섬에서 피난처와 보급품을 제공하는 곳은 교회가 유일하다. 그래서 제임스는 목숨 걸고 이 다리를 건넜다.

우크라이나의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마지막 날’을 요한계시록에 적힌 먼 종말로 보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라고 그들 중 한 명이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삶에서 연기, 폭발, 잦은 정전을 마주하며 진실을 마주한다: 우리는 여기에 잠시 있을 뿐이고, 내일은 이 땅을 떠날지도 모른다.

러시아가 헤르손을 점령하자 제임스 부부는 “우리가 죽는다면 함께 죽는다”고 결심하고 가족과 함께 도시에 남기로 했다. 그들에게는 가장 어린 네 살배기부터 17살까지 네 명의 아이들이 있다. 이들은 러시아 포격이 5층 아파트를 젠가 블록처럼 흔드는 모습, 둘째 딸이 비명을 지르며 아이들을 모아 교회로 달려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남기로 한 것은 어렵지만 당연한 결정이었다고 제임스는 말했다. “우리는 사람들의 눈에서 절망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내일을 볼 수 없었습니다. 제가 미국이나 유럽으로 도망친다면 누가 그들에게 희망을 주겠습니까?”

3주 동안, 그들은 교회 계단 아래에서 잤다. 약 300명의 사람이 교회 지하에서 몇 달 동안 피신했다. 

사람들은 앉아서 자기도 하고 남자 화장실에서도 잤다. 생후 8개월 된 아기를 둔 가족은 5피트짜리 높이의 옷장 안에 끼어서 생활했다.

제임스는 겨우 1년 전 이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다.

제임스가 러시아 점령지에 가족과 함께 남기로 선택한 것은 특별하다. 보통 최전선에 있는 우크라이나 목사들, 특히 어린 아이들이 있는 사람들은 그의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다른 사람들은 가족들 함께 떠났거나 가능한 한 오래 머물렀지만 결국 떠나갔다.

본격적인 침략이 시작되고 1년이 지난 오늘, 떠난 많은 목회자는 돌아갈 교회가 없다. 그들의 신도들은 흩어졌고, 교회 건물들은 파괴되었으며, 전쟁으로 고통 겪은 신도들은 목사들이 돌아오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을 ‘고아 목사’라고 부른다”고 세계 최대 개신교 단체인 우크라이나 침례교 연합 회장인 발레리 안토니욱이 말했다. 안토니욱은 우크라이나에 있는 2,100여 명의 침례교 목사 중 약 200명이 대피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약 200명 이상이 군 복무에 소집되었다. 많은 사람이 다른 교회로 재배치되어야 했지만, 대피한 사람들의 절반은 돌아왔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교회와의 재통합이 “고통”이라고 안토니욱은 말했다. 위기 상황에서 목회자들이 떠난 것에 대해 원망하고 상처받은 교인들이 있는가 하면, 그들이 사역을 계속하는 것을 걱정하는 교인도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많은 교회가 이러한 문제들을 직면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남아 있던 일부 목회자들이 러시아군에 체포·협박·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한다. 어떤 사람들은 사라져 버리기도 했다. 이러한 공포스러운 이야기들이 신도들 사이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파벨 스몰야코프는 헤르손주의 침례교 교회의 목사이다. 그가 다니는 교회인 갈보리침례교회는 헤르손에서 대표적인 교회이다. 침략이 있은 지 하루 만에 갈보리침례교회는 지역 보육원에서 4개월에서 네 살까지의 고아들 46명을 데리고 왔다. 러시아군이 그 지역을 폭격하고 있었기에 이 보육원이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달 동안, 교회는 아이들을 지하에 피신시켜 보호했다. 교회 성도들은 아이들을 먹이고, 청소하고, 따뜻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도왔는데, 그들 중 어떤 아이들은 특별히 24시간 돌봄이 필요했다. 자원봉사자들은 매일 필요한 약, 우유 및 기타 유아용품을 조달하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줄을 서서 도시 전역에서 받아왔다.

스몰야코프는 불안한 아이들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무겁게 느꼈다. 러시아 군인들은 아이들을 전쟁을 선전하는 데에 사용하려고 했다. 지속적으로 관계자들은 교회 문을 두드렸고, 직원들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누가 이곳의 책임자인지 왜 그들은 이 고아들을 데리고 있는지 추궁했다.

그리고 부활절 일주일 전이었던 어느 날, 아침에 제복을 입은 러시아 관리가 무장한 군인들을 데리고 나타나 스몰야코프에게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남아 있는 보육원 직원과 자원봉사자들이 아이들을 보육원으로 데려가거나 그러지 않으면 군인들이 고아들을 강제로 데리고 가겠다고.

목사는 아이들이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왔고, 예상했듯 목사는 위협을 받았다. 스몰야코프는 그의 사진이 러시아 TV에 나왔다고 말했다. 러시아인들이 인신매매범으로부터 고아들을 구조했다고 주장하며 그와 교회가 미국 암시장에 아이들의 장기를 팔아넘겼다고 비난했다. 스몰야코프는 “그때부터 생명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4일에 걸쳐 러시아 검문소를 피해 오데사로 몰래 빠져나갔다.

헤르손주 주지사가 보낸 텔레그램 게시물을 통해 마지막으로 목사가 들은 소식에 따르면, 아이들은 러시아가 무력으로 합병한 크림반도 지역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스몰야코프의 이야기를 듣다가 두 아이의 부모이기도 한 젊은 목사인 우리 쪽 통역사가 잠시 말을 멈추고 눈을 닦았다.

스몰야코프에게는 여전히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그는 “지금 제 감정을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다른 많은 우크라이나인과 마찬가지로 대피하기로 선택한 우크라이나 사역자들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들은 남겨진 사람들을 걱정한다. 한 목사는 러시아군이 주일 예배 도중에 교회를 폐쇄하고 집을 샅샅이 뒤져서 지난 9월 점령당한 도시를 탈출했다고 했다. “그것이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는 것이 더 중요하고 판단했다”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대피했지만 노인 200여 명이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다.

아직 점령지에 있는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 익명을 요구한 이 목사는 현재 사실상 노숙자가 돼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러시아군이 점령하고 있는 자신의 교회로 돌아갈 수 있는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처럼 일종의 유대감을 형성하며, 온라인에서 우크라이나와 전 세계로 대피한 교구민들과 매일 접촉하고 있다.

그는 “신학교에서는 점령당한 국가에서 어떤 방식으로 사역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다. 15개국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을 위한 목사가 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제임스의 교회에서는 장로 5명 중 3명이 헤르손을 떠났다. 찬양대, 주일 학교 교사, 청년목회자 등 목회 지도자 대부분이 사라졌다. 침략 초기 교회에는 수십 명의 봉사자가 지도자들의 일을 대신했다. 하지만 상황이 악화되자, 더 많은 사람이 대피할 수밖에 없었다.

배고프고 절망적인 수백 명의 사람들이 교회 밖에 모였을 때, 제임스는 한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느꼈다. 몇 달 동안 전기도, 더위도, 물도 없이 유난히 추운 겨울을 견뎌왔을 주변의 외딴 마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가 돕지 못한 점이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서 변함없이 그의 곁을 지켜주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한결같은 교회 자원봉사자들을 본다. 그는 오늘 감당할 일을 하기에 충분히 채워주셨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그들의 존재는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하나님께서 위로하시는 시편 23편의 막대기와 지팡이와 같다.

전쟁 초기부터 제임스와 함께하며 교회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도운 20대 두 청년이 있다. 지난 일 년 동안, 그들은 가족만큼이나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둘 다 러시아인들의 타깃이 될 것을 우려해 이름을 밝히지 않기를 요청했다).

헝클어진 짙은 수염과 열정적인 눈빛, 검은 청바지를 입고 ‘간달프’ 같은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40대 제임스는 그들과 묘한 삼인조가 된다. 그중 한 명은 끊임없이 제임스 목사를 놀리며 농담을 한다. 다른 한 명은 붉은 머리카락 색에 안경을 썼고, 단 것을 좋아하는 날씬한 바이올리니스트로, 사려 깊은 사람이다.

이들은 교회 지하에 있는 얇은 매트리스 위에서 잠을 자고, 두 청년이 돌아가며 밤에는 위층을 지키고 있다. “우리는 교회를 지키는 자 입니다.” 청년 중 한 명이 내게 말했다. 선택의 여지가 있는데도 헤르손에 남아 있는 젊은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화요일, 섬이 있는 교회에 합판을 가져다주기 위해 제임스와 동행했을 때, 그 청년 두 명이 함께 탔다. 목사의 오래된 밴에는 뒷좌석이 없어서, 청년들은 흔들리는 플라스틱 아동용 의자에 앉아 이동했다.

이렇듯 고아처럼 신도 없이 남겨진 목회자들이 있는가 하면, 신도들이 떠난 교회 건물도 그렇게 홀로 남겨져 있다. 그 교회의 목사는 침략 첫날 가족과 함께 피신했다. 그 교회의 신도들 대다수도 도망쳤다.

제임스는 공식적으로는 목회자 자격이 없는 음향 엔지니어 교인 한 명에게 이 교회의 리더쉽 자리를 맡겼다. 엔지니어 네보드(가명)는 길 건너 아파트에 산다. 러시아의 미사일이 자신이 일하던 공연장을 파괴했을 때, 그는 방공호 및 사회봉사센터를 겸하는 교회 건물로 피신했다.

그가 어느 날, 발전기를 끌어와 건물에서 600대의 휴대 전화를 충전할 수 있었다. 러시아의 포격 중에도 약 200명의 사람들이 지하에 대피할 수 있다.

우리가 교회에 들어갔을 때 제임스는 “이제 네보드는 목사입니다.”라고 말했다.

네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그가 격하게 부인했다. “목사는 아니고 자원봉사자입니다.”

“맞아요, 당신은 목사입니다.”라고 제임스가 재차 말했다. 제임스가 구글 번역기에 우크라이나어를 입력하고 나에게 그의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희생하는 사람”라는 단어가 영어로 표기되어 있었다. “바로 이 사람입니다.” 제임스가 네보드를 향해 손짓했다. “네보드는 이곳에서 9개월 동안 무보수로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습니다.”

9개월. 러시아가 헤리손을 점령한 기간. 그 상황에서,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사람들은 수많은 일을 겪었다.

헤르손은 침공 이후 전쟁이 시작되자 거의 곧바로 몰락한 최초의 핵심 도시이자 러시아군이 점령한 유일한 지역 수도다. 한때 풍요로운 농업 토양을 가진 번창하고 경제적인 중심지였던 도시는 하룻밤 사이에 유령 마을이 되었다. 몇 달 동안 사람들은 자신들의 집 안에 숨어 지냈고, 필수품을 찾으러 나갈 때만 잠시 서둘러 나갔다. 이른 오후 시간에도, 거리는 떠돌이 개들만 돌아다닐 뿐 텅 비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심리를 가지고 논다”고 한 목사는 나에게 말했다. “러시아는 영원하다, 만세!”라고 빌보드에 몇 달간 예고했고, 결국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믿기 시작했다.

11월 11일, 시민들이 춤추며 거리에서 셀카를 찍으며, 파란색과 노란색 깃발을 들고 우크라이나 탱크와 함께 헤르손 시내를 행진했다. 제임스는 처음에는 도시가 정말 해방되었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러시아인들이 이번에는 어떤 속임수를 쓰고 있나 의심했다. 이전에도 러시아 군인들은 친우크라이나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민간인 또는 우크라이나 군인 복장을 했었다.

그는 기뻐할 시간이 없었다. 축하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생수와 빵을 받으려고 이미 교회에 줄을 서 있었다.

러시아군은 후퇴하며 그 지역의 중요한 기반 시설을 파괴했다. 약 3주 동안 전기, 수도, 난방, 전화 서비스가 없었다. 해방의 첫날이 끝날 무렵, 거리가 완전히 어두워진 시간에 7,000여 명의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교회 밖에 줄을 서 있었다.

어찌 보면 러시아가 점령했던 시기보다 해방된 이후 헤르손의 도시 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지난 12월 초 방문했을 때도 여전히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 많았다. 상점들, 은행들, 식당들, 학교는 여전히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직업이 없었다. 아이들이 없는 놀이터의 그네가 흔들리고 있었다. 오후 7시 30분, 통금시간 이후의 도시에는 불안한 정적이 흘렀고, 또 강 바로 건너편에서 산발적인 폭격이 밤새 들려오며 도시를 뒤흔들었다.

헤르손 정부에 따르면 이 섬을 방문한 날 러시아인들은 대부분 민간인 지역을 공격하며 헤르손에게 51차례 포격을 가해 2명이 숨지고 1명이 다쳤다.

그날 오전 10:20 A.M.에 첫 번째 포격이 들려왔다. 제임스와 네보드는 교회 밖에서 구호 물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고, 노인 한 명과 임신한 두 여성이 다가와 도움을 요청했다. 러시아가 쏜 거대한 로켓의 폭발 소리가 꽤 가까이에서 들렸을 때, 그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나이가 많은 여성이 어린 여성을 두 팔로 감쌌고, 그들은 네보드와 함께 서둘러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나가야 해요.” 밴이 있는 방향으로 제임스가 팔을 흔들며 소리쳤다. “갑시다!”

우리는 모두 그의 밴에 뛰어들었다. 제임스는 가속 페달을 밟았고, 우리는 교회가 있는 섬 지역을 벗어나 다리를 건넜다.

러시아 탱크가 학교에 총을 쏘고, 러시아 군인들이 식당에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동안 아이들은 굶주리고 있고, 러시아인들이 헤르손의 농부들로부터 농작물과 장비를 약탈하는 등 수많은 나쁜 일들을 제임스가 보았다고 말했다. “이것은 전쟁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그가 손을 꽉 쥐었다. “이건 집단학살입니다.”

교회로 돌아가는 길에, 제임스는 짓밟힌 모래성처럼 보이는 시내 건물을 가리켰다. 우크라이나군이 미군이 보급한 히마스 로켓포를 발사해 파괴하기 전에는 러시아 기지였다고 말했다. 목사는 이를 내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너무 좋아요,” 그는 영어로 소리쳤다. “히마스, 만세!”

(다음호에 계속)

04.01.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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