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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카드’를 함부로 쓰지 말자

“저 사람과 데이트하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성령님이 나를 이 직업으로 이끄셨어요.”

“하나님이 어젯밤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이 이런 생각을 주셨어요.”

 

그리스도인들이 주고받는 대화에서 이른바 “하나님 카드”(God card)를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니까 내가 내린 어떤 결정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결정의 순간을 놓고 볼 때, 그게 과연 나의 뜻이었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어떤 영감이 작용한 건지 분명하게 구분하는 건 쉽지 않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게 과연 정당한 걸까, 아니면 지극히 인위적인 걸까? 구체적인 성경 말씀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속삭임, 느낌, 충동, 즉흥적인 생각, 그리고 주장으로 바뀔 때, 대화는 엉망이 될 뿐 아니라 남용되기 쉬운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분별력 있는 신자라면 모든 암시를 무분별하게 다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는 “맞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의 문화를 조장하기보다는 모든 것을 검증해야 한다(살전 5:21). 성경이 검증하라고 명령하는 이유는 가짜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하나님 카드가 잘못 쓰이는 네 가지 이유를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게 과연 정당한 걸까?

 

1. 고립

 

코로나19가 하나 확실하게 가르쳐준 게 있다면, 교회 공동체로부터 고립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에게 나쁜 신학이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만드는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혼자 있을 때는 그 어느 때보다 쉽게 속고 방향 감각을 잃는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죄 성이 불러일으킨 충동마저도 하나님의 인도로 착각하곤 한다. 

“고립이 불러일으킨 끔찍한 상황”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 사례는 끔찍한 사회적 고립을 겪은 마빈 히메이어(Marvin Heemeyer)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TREAD이다. 그는 적대적인 이웃의 비즈니스를 파괴하기 위해 비밀리에 불도저를 장갑차로 바꾸는 데 몇 달을 보냈다. 그리고 미리 녹음한 선언문에서 파괴의 난동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라고 주장했다. 

TREAD 같은 사건을 단지 극적이고 예외적인 고립 사례로 치부하면 안 된다. 우리는 모두가 스크린을 눈앞에 끼고 사는 디지털 시대를 살고 있다. 실제로는 내가 나에게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어”라고 착각하는 건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항상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고 책임을 다하며 산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나를 진짜로 아는 누군가의 조언 없이는 누구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 감각을 잃을 수 있다. 

누군가에게 가서 하나님이 “너한테 그렇게 말씀하셨다”라고 주장하기 전에, 당신이 느끼는 바를 믿을 수 있는 다른 교인에게 먼저 이야기하라. 당신 생각에 주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느끼는 그것을 “제대로 검증”하기 전에는 결코 다른 사람에게 가서 하나님 운운하는 “하나님 카드”를 꺼내면 안 된다. 

 

2. 습관성 어휘

 

일부 기독교 교파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가 어지러울 정도로 많다. 나를 이 가게에 오게 하신 것도, 이 자리에 주차하게 하신 것도, 저 사람에게 메모를 쓰게 하신 것도, 이 거리를 걷게 하신 것도, 그리고 팬케이크 대신 오늘 달걀을 주문하게 하신 것도 다 하나님이 인도하셨기 때문이란다. 

하나님께서 5초마다 말씀하신다는 이런 식의 주장은 비성경적이다. 성경이 약속하는 것은 지혜의 원리이다. 성경은 우리를 지혜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도록 인도한다. 언젠가 나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성경의 권위 아래 살 때 하나님의 뜻은 애타게 길을 찾아 헤매는 미로라기보다는 즐기면서 탐험하는 정원과 비슷하다.” 

모든 결정에 대해서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어”라고 끌어댈 필요가 없음을 아는 것만으로도 자유함을 누릴 수 있다. 그 대신 우리가 취할 행동은 성경에 뿌리를 내리고 위험을 감수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미지의 세계를 앞에 놓고 용기 내어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모든 변덕을 합리화하려고 경솔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은 하나님의 입에 당신의 생각을 담는 위험한 일이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절대로 바람직하지 않다. 

행여라도 “하나님 카드”를 자주 이용한다면, 다음 두 가지 중 어느 쪽인지 생각해보라. 당신의 언어에서 제거해야 할 생각 없이 뱉는 습관성 용어인지 아니면 주님께 진짜 들은 메시지를 제대로 반영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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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책임 회피

 

때때로 반대하는 사람을 제압하기 위해서 하나님 카드를 쓰는 경우가 있다. 당신이 바라는 목표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내림으로써 상황에 따라서는 규칙을 바꾸거나 대다수의 반발까지도 무시할 수 있다.

책임 회피를 위해서, 원하는 바를 실현하기 위해서, 또는 죄를 변명하기 위해서 하나님 카드를 사용하는 경우라면, 그 사람이 그 카드를 포기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런 사람에게 정면으로 대응한다면, 그는 이렇게 반발할지도 모른다. “아니, 당신이 무슨 권리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간섭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내게 하신 말씀에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맞냐 틀리냐를 따지는 겁니까?”

이런 식의 반론은 건강한 공동체일수록 서로를 검증하고 바로잡는다는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이다(마 18:15-20).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사람은 공동체로부터 그 음성의 진위를 분별 받아야 한다(행 9:26-28; 11:1-18). 하나님에 대한 배타적인 접근, 또는 책임에 대한 면죄부 주장은 바른 기독교가 아니라 이단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다른 그리스도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 하나님 카드를 사용하는 경우라면 기억해야 한다. 그 사람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활용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것이다. 

 

4. 실패가 두려워서

 

수많은 선택이 주는 압박감과 과거의 실패가 주는 절망 속에서 사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승인”이라는 명확한 도장이 찍히지 않는 한 여간해서 선택하려고 하지 않는다. 

망설이던 결정에 대해서 하나님의 승인을 받으면 기분이야 좋겠지만, 인생에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최종 목표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보다는 어떤 결과를 맞게 되더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게 더 가치 있지 않을까? 아무리 좋은 의도와 현명한 계획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위험이나 실패에서 구해 주겠다고 약속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약점까지 활용해서 승리를 만들어내는 PR 요원이 아니다. 하나님은 좁은 길을 걷다 넘어지는 양과 함께하시는 분이다. 때로는 최악의 상황에 있는 양에게 가장 좋은 가르침을 주시는 선한 목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명확성, 신비함, 겸손

 

나는 부주의하게 하나님 카드를 사용한 사람으로 일생을 마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그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데에 또는 교회 공동체와 더불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검증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며 완고하게 거부하는 사람으로도 살고 싶지 않다. 

순수한 것과 마찬가지로 가짜도 분명히 존재한다. 따라서 대담함과 소심함이라는 양극화된 함정을 피하면서 하나님 카드에 현명하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명확성과 신비와 겸손이라는 세 가지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명확성: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가장 분명한 계시이다. 우리 손에는 이미 많은 양의 귀중한 보석이 들려있다. 따라서 굳이 새로운 “영적 금맥”을 찾기 위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신비: 하나님은 무한하고 우리는 유한하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을 인간의 사고 체계라는 한계 속에 넣으면 안 된다. 우리가 가진 인지적 한계의 벼랑에서 바라볼 때 하나님은 그랜드캐니언을 백만 배 합친 것보다 더 광대하시다. 선입관이라는 한계 속에서 사는 인간은 결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어떤 말을 해도 절대로 모순되지 않는다. 

케네스 버딩(Kenneth Berding)은 성경 속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가장 명확한 방식에서 가장 명확하지 않은 방식으로의 연속이라는 측면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의 글은 전체를 다 읽을 가치가 있다). 다음은 그의 결론이다. 

결정을 내릴 때마다 항상 특별한 인도를 경험할 거라는 성경의 약속은 없다. … 그렇더라도 진심으로 성경적인 결정을 하려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이 인도하실 수 있도록 공간을 허용해야 한다. 때로는 전혀 모호함이 없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그러나 어떤 때에는 충동과 속삭임으로 때로는 재정립된 생각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신비가 분명한 정의와 예측 가능성을 어렵게 만들지만, 성경은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게 하나님이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거나 인도하시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겸손하게 말해야 한다. 성경이 보여주는 사례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라는 식의 절대적 언어가 아니라 부드러운 고백이다. 

“성령과 우리는 … 더 이상 아무 무거운 짐도 여러분에게 지우지 않기로” (행 15:28).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 것이고, 또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할 것이다” (약 4:13-15).

우리가 서로 대화할 때도 “천천히 말하는 것”이 맞는다면, 하나님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더 신중해야 한다는 걸까? 

by Will Anderson, TGC

 

09.09.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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