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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미디어를 통한 자기 위로의 위험

얼마 전 나는 Wired 인쇄판에서 “크라우드소싱 치료”를 통해 소셜 미디어에서 “자기 위로”(self-soothing)를 선호하는 우리 세대에 관한 통찰력 있는 칼럼 하나를 접했다. 검증을 위해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온라인 “커뮤니티”로 전환하고 있고, 그에 따라서 자신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수단으로 점점 더 “치료 말하기”를 의존하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이런 흐름이 실제로 치료를 담당하는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인해서일 수도 있지만, 문제는 이런 추세가 온라인에서 점점 더 많은 청중을 확보하는 일종의 치료의 대체 역할을 한다는 데에 있다. 

대충 증세를 확인하고 의료 잡지 WebMD를 정독함으로, 자신이나 가족의 병명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착각하는 잘못된 자신감처럼, 우리는 다양한 심리적 질병에 대해 조언을 제공하는 온라인 자기 계발 전문가와 자칭 치료사를 지나치게 신뢰하고 있다. The Atlantic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이 시장에는 확실한 청중이 있다. “수많은 소셜 미디어가 우리의 불안, 트라우마, 고통에 대해 더 잘 인식하라고 말하는 영향력 있는 치료사의 목소리로 가득하다. 인스타그램에는 불안한 고백과 치료 이야기로 차고 넘친다. TikTok 해시태그 #Trauma의 조회수는 60억 회 이상이다. … 5,500개 이상의 팟캐스트 제목에 트라우마라는 단어가 들어있다.”

우리 사회에 트라우마, 학대, 우울증, 불안, 그리고 독성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단어를 초래하는 다양한 사회적이고 또 심리적 문제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한 사람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는 훈련된 전문가로부터 받는 치료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정신 건강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방송하는 비전문가로 가득 찬 생태계, The Atlantic이 “치료 미디어”라고 부르는 세계를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형성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불안 장애에 대한 정보를 너무 많이 접하는 바람에 정상적인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겪는 문제까지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징후로 받아들이고” 있다.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각종 멍청한 진단과 단순한 해결책을 고려할 때, 틀린 말이 아니다.

자기 위로와 관계 붕괴

 

온라인 치료를 실제 관계에 적용하려는 시도보다 이 문제가 더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도 없다. Wired 칼럼은 당신이 소셜 미디어의 세계가 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공동체라는 환상에 어떻게 빠져드는지를 설명한다. 정체성 그리고 당신의 느낌이 특별하다고 생각할 때마다 과도한 자기만족에 빠지기 마련이며, 그건 종종 타인과의 관계에까지 해를 끼친다. 그러므로 대중 수준으로 격하된 치료의 결과로 일어나는 관계 붕괴를 목격하는 건 놀랍지 않다. 나아가서 대인 관계에서 긴장도를 높이고 모든 상호 작용에서 위기를 초래한다는 의심까지 하게 된다. 

“그녀가 하는 건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에요. 당신을 지금 가스라이팅하고 있어요.”

“단지 사람만 틀린 게 아니에요. 그의 견해가 해로운 겁니다.”

“당신이 굳이 그 사람과 눈이 마주치지 않는 건, 그가 틀림없이 여성혐오자이기 때문이지요.”

“그녀가 당신하고 어울리지 않는 건 인종차별주의자이기 때문이에요.”

“상사가 ‘당신은 함께 일하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사실상 ‘당신은 우려먹기가 힘들다’라는 뜻입니다.” 

내게 안정감을 주는 온라인 세계에만 갇혀서 끊임없이 자신의 관점을 검증하는 사람은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을 왜곡되고 해로운 방식으로 해석하기 쉽다. 갈등이 생기거나 힘든 대화를 해야 할 경우를 만나면, 당신을 불편하게 만든 사람을 비난부터 하기 쉽다. 상대가 당신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고 자신만을 옹호하는 경우에 그 태도는 당신 눈에 자기애에 빠진 사람이라는 증거가 된다. 상대로부터 아무런 반발이 없어야, 당신이 옳았다는 의미가 된다. 

 

자기 위로와 의심

 

이러한 조건에서 관계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모든 불일치나 갈등이 누군가가 권력을 행사하거나 통제력을 유지하는 방법의 결과라는 의심을 품고 있는 상황에서 정상적인 인간관계와 상호작용이 이뤄질 리가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숨은 동기를 갖고 있다고? 당신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더 나은 무언가를 열망하는 당신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게다가 이와 같은 진단은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광범위하다. 물론, 분석이 사실인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당신을 덮치려는 상사가 있을 수도 있다. 그 사람이 인종차별주의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사나 밈, 소셜 미디어 전문가가 어떻게 그 차이를 알 수 있을까? 모든 상황에 무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치료 언어는 도움은커녕 해로울 뿐이다. 모든 경우를 똑같이 평면화해버린다. 

더 나쁜 것은, 소셜 미디어 자체 검증은 나쁜 행동마저도 선의의 표시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문제가 될 수도 있는 태도나 행동, 그래서 바꾸려고 노력해야 할 대상이 도리어 당신의 선함을 드러내는 증거로 둔갑한다. 당신은 완고하고 고집이 센가? 전혀 아니다. 단지 당신은 당신을 무너뜨리려는 사람들 앞에서 굳건하게 버텼을 뿐이다. 당신은 교활하고 음흉한가? 아니다. 관계 탐색에 있어서 당신은 누구보다 영리하기에, 누구도 당신을 가지고 놀 수 없다. 당신은 너무 예민하고 항상 불안한가? 무슨 소리인가? 전혀 아니다. 당신은 단지 개인적인 모욕과 주변의 불공정한 분위기에 올바르게 적응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온라인 치료 크라우드소싱의 가장 큰 문제이다. 모든 문제와 어려움을 다 타인의 불의와 죄, 그리고 이기심 탓으로 돌리며, 그것들이 당신으로 하여금 진정한 자아를 발휘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는 식으로 당신을 위로한다. 같은 비판에 괴로움을 느끼는 다른 사람들과 친밀감을 느낄수록, 당신은 공동체에 참여한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당신은 점점 더 개인화되고 있을 뿐이다. 

 

자기 위로와 외로움의 감옥

 

Wired는 또한 내가 작년에 언급했던 문제, 즉 “트라우마”와 “학대”와 같은 언어에 일어나는 희석 현상을 지적했다. 한때 정신 건강 커뮤니티에서 쓰이던 단어가 이제는 일상적인 스트레스와 갈등이 발생하는 상황에서도 적용된다. 직원과 어려운 대화를 나누는 상사가 있다. 그런데 갑자기 직원이 ‘나는 지금 힘듭니다.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것 같아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건 이런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내 감정이 상했기에 상사는 내게 학대자인 것이다. 또는 스트레스를 느끼기에 내 직업은 나를 “자극”하는 유해 장소가 되는 것이다. Wired는 이렇게 말한다. 

정상적인 인간 갈등과 불일치를 훨씬 더 복잡한 것, 즉 학대, 정신병, 임상적 나르시시즘으로 병리화하기 쉽다. 이런 식의 단어를 씀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당신을 화나게 하는 사람을 저주하는 건 매우 쉽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갈등을 해결하거나 자신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하는 대신 결국 벽을 쌓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당신은 전보다 더 외로워질 것이다. 거기가 바로 우리가 있는 곳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지킨다는 생각에 벽을 쌓았지만, 실제로는 나를 지켜주는 그곳이 감옥인 셈이다. 이 모든 것이 진짜 커뮤니티를 죽인다. 갈등 없는 긴밀한 공동체란 불가능하다. 그 어떤 불일치나 갈등 없이 유지되는 공동체는 사실상 가장 천박하고 피상적인 우정으로 이뤄진 곳이다. 

 

자기 위로와 교회

 

이 모든 이야기는 그럼 교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더불어 사는 삶에서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형제자매들의 짐을 지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더욱이 때때로 형제자매, 그들의 존재가 짐이 되기도 한다. 그때야말로 당신은 가족의 의미를 깨닫는다. 형제가 당신의 짐이 되어도 여전히 당신은 그 곁에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단순히 조종당하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기 위해서 우리를 참으셨다. 우리도 똑같이 해야만 한다. 무엇보다 치료 대화로 이어지는 디지털의 특성을 제대로 인식해야 한다. 대화와 갈등 속에서 드러나는 디지털의 함정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 

참된 기독교 공동체는 누군가의 감정이 항상 옳아야 한다거나, 무언가가 항상 객관적인 진실로 여겨져야 한다는 생각과 공존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체험 또는 개인의 특성과 동의어인 “나의 진실” 또는 “당신의 진실”을 주장한다면, 우리는 결코 조화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성경에 호소하지 않는 한, 다른 신자들의 지혜와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한, 오늘날의 치료에서 말하는 것보다 더 깊은 진리로 나아갈 방법을 찾지 않는 한, 그리고 죄와 회개, 용서와 화해, 수용과 열망을 추구하지 않는 한, 교회가 아무리 살아있는 공동체를 약속하더라도 사람들은 결국에 고립을 초래하는 피상적인 온라인 세계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by Trevin Wax, TGC

02.03.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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