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문화 변증이 최신 트렌드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상징주의로 가득 찬 영상으로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금발 팝 아이콘의 매력적인 곡과 그녀의 데이트 생활 등등에 관해 쓴 수많은 글을 살펴보라. 그녀의 모든 움직임은 페미니즘, 섹슈얼리티, 팝 스타덤의 본질에 대한 격렬한 논쟁까지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단순한 가수가 아니다. 하나의 문화 현상이다. 그녀의 독특한 스타일을 따라하는 열렬한 팬들로 넘치는 모든 콘서트는 말 그대로 매진 이벤트이다. 그녀를 개척자라고 칭찬하던 비평가들은 또 어느 날 갑자기 부패한 영향력이라며 비난을 쏟아낸다. 한편으로 수많은 기독교 평론가들이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연일 그녀의 최신 히트곡을 분석하여 그 속에 숨겨진 의미와 잠재적인 복음과의 연관성까지 찾기 위해서 수많은 기사를 쓰고 있다.
잠깐, 혹시 내가 지금 테일러 스위프트를 말하는 것 같은가? 아니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사람은 1985년경의 마돈나이다. 오늘날 팝 스타처럼 마돈나는 한때 문화적 주목을 받았다. 당시 그녀의 작품을 둘러싼 주제였던 정체성, 반항, 삶의 의미 등에 대한 탐구는 오늘날 팝 문화 논쟁에서도 똑같은 형태로 재현되고 있다. 하지만 단지 트렌드 파악에만 서두르다 보면 중요한 진실을 놓치기 마련이다. 이러한 문제는 전혀 새로운 게 아니고 그것들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전혀 새롭지 않다는 사실이다. 현재 트렌드를 이해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진짜 깊은 영적 통찰력은 인간이 항상 접하는 의문을 다루는 진짜 작품에서 나온다. 즉 시간이라는 시험을 견뎌낸 고전을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는가에 달려있다.
1980년대 십대였던 내게 마돈나의 히트곡 들에 대한 분석보다 더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역사, 예술, 철학이라는 더 깊은 우물에서 영감을 얻도록 만든 프랜시스 쉐퍼 같은 사상가의 작품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1976)에서 쉐퍼는 현대 사상을 형성한 폴 세잔, 존 케이지, 그리고 잉마르 베르그만의 작품을 고찰한다. 나는 그 예술가들의 그림을 본 적도, 음악을 들어본 적도, 또 영화를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사례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마돈나의 히트곡 “Papa Don't Preach”나 “Like a Virgin”의 가사를 면밀히 읽는 것보다 훨씬 큰 가르침을 얻었다.
쉐퍼는 문화적 변증과 관련해서 강력하지만 종종 간과되는 접근 방식의 거장이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 우리의 집단의식 속에서 성숙할 시간을 충분히 가짐으로 “레트로”로 간주되는 문화적 시금석을 살펴봄으로 영원한 진리를 파악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노래, 영화, 책, 그림 또는 기타 작품 등등 시간의 시험을 견뎌온 문화적 유물을 조사함으로써 우리는 지나가는 순간뿐 아니라 인간 경험의 지속적인 측면을 드러내는 영적 통찰력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접근 방식을 통해 단지 표면적 분석 내지 반사적인 반응을 넘어 예술, 문화, 신앙이 어떻게 교차하는지에 대한 더 깊은 성찰을 기대할 수 있다.
트렌드를 중심으로 하는 변증의 약점
레트로 문화 변증은 또한 지혜에 대한 성경적 개념과 긴밀하게 일치한다. 잠언 1:5은 “지혜로운 자는 듣고 학식을 더하며 명석한 자는 지도를 받으라”고 말한다. 오랜 세월 동안 생명을 유지한 작품을 연구함으로 우리는 선조들의 지혜를 구하라는 성경의 명령에 순종한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기독교의 문화 참여는 최신 대중문화에만 집중함으로써 도리어 정반대의 길을 따랐다. 최신 노래, 영화 또는 입으로 전해지는 트렌드를 분석함으로 변증학자는 신학적 연관성을 찾는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대화의 출발점을 찾는 데에는 유용할지 모르나, 몇 가지 심각한 한계를 드러낸다.
첫째, 대중문화의 본질은 일시적이다. 오늘날 대중 의식을 지배하는 트렌드가 내일이면 잊힐 수 있다. 트렌드에 집착하는 변증 작품은 나오자 마자 바로 잊힐 수 있다. ‘원더우먼’에게서 권한 부여와 희생이라는 주제를 탐구하거나,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 구원 서사(redemption arcs)를 탐구하는 기독교 사상을 한번 상상해 보자. 이런 식의 분석이 잠시나마 가치 있는 대화를 불러일으킬지 몰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가 되어버릴 것이다. 원더우먼이나 스파이더맨 같은 작품이 기억되지 않는 이유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이나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 소설과는 달리 인간의 고통이나 은혜의 복잡성을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대중문화 연구(engagement)는 종종 삶과 신앙의 진짜 중요한 질문보다는 권한 부여나 개인주의와 같이 쉽게 소화할 수 있는 주제에 초점을 맞춘다. 예를 들어, 적지 않은 기독교 평론가들이 구원의 서사나 도덕적 교훈의 흔적을 찾기 위해 팝송을 분석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종종 억지스러울 때가 많다. 슈퍼히어로 영화는 폭력과 은혜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할 수 있지만, 고전으로 인정받는 작품처럼 인간의 죄, 고통 또는 은혜의 복잡성을 완전히 다루는 경우는 드물다.
또한 최신 문화적 트렌드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과도한 상황화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그 결과 복음을 아예 현대 팝 서사에 맞게 희석하거나 단순화할 수도 있다. 이 경우에 당면하는 위험은 세상과 관련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그리스도를 통한 충만하고 풍부한 구원의 복음을 제시하기는 커녕 기독교를 일련의 도덕 원칙으로 축소하는 방향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제 3년이 지났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느낌을 주는 ‘완다비전(WandaVision)’에 대한 기독교 분석 기사를 한번 살펴보자. 그 영화를 놓고 슬픔과 현실 왜곡이라는 주제를 탐구한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서 영화가 표현하는 상실에 대한 탐구를 고통 및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함으로 신학적 토론으로 이어졌던 글이 얼마나 있었던가? 무엇보다 단지 만화책 쇼를 놓고 그렇게 많은 고민을 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처럼 진정한 영적 성장으로 이어지는 지속적인 성찰을 위한 지혜를 빠른 속도를 특징으로 하는 대중문화 속에서 찾기란 모래판에서 바늘 찾기와 다르지 않다.
레트로 문화 변증의 풍성함
트렌드를 따라가는 데 열중하는 접근 방식과 대조적으로, 레트로 문화 변증은 더 깊고 성찰적인 분석을 제공한다.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예술 작품, 문학 작품, 영화에 주의를 돌리면 순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더 광범위한 인간 조건에 대한 통찰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인을 삶의 근본적인 질문과 씨름해 온 역사 전반의 위대한 사상가, 작가, 예술가 간의 지속적인 대화, 한마디로 위대한 대화(Great Conversation) 속으로 초대한다. 이 대화는 수세기에 걸쳐 문화를 넘나들며 진실, 아름다움, 미덕, 정의, 현실의 본질과 같은 주제를 다룬다. 위대한 지성들과 교류함으로 그리스도인은 이제 더 광범위한 대화를 창출할 수 있고 그 결과 인생의 해답을 갈구하는 세상에 복음만이 줄 수 있는 독특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변증가의 한 명인 C. S. 루이스는 종종 고전이 주는 지혜에 의존했다. 루이스는 인간 폐지에서 현대 교육 시스템을 비판했는데, 그 과정에서 현대 문화를 참고하기보다는 고전 철학과 근대 이전 윤리에 깊이 의존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구축했다. 루이스는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그리고 기독교에 근거해서 도덕적 사고를 형성한 중세 신학자 같은 사상가들과 폭넓게 교류한다. 위대한 대화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해서 루이스는 현대 세속주의에 대한 심오한 비판을 제시할 수 있었고, 오늘날까지도 그의 작품은 깊은 공감을 얻고 있다. 마찬가지로 G. K. 체스터턴 및 쉐퍼 같은 사상가들은 그 시대 위대한 사상을 논하기 위하여 레트로 변증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역사, 철학, 예술을 활용하여 기독교 세계관의 일관성과 더불어 진실성을 입증했다. 광범위한 사상과 나눈 대화에 뿌리를 둔 그들의 변증은 청중의 즉각적인 관심사뿐 아니라 존재, 도덕성, 그리고 삶의 의미와 같은 깊고 지속적인 질문까지도 다루고 있다.
레트로 문화 변증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삶의 속도를 늦추고, 현재 순간의 소음에서 잠시 물러나, 수세기 동안 문명을 형성해 온 진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최신 트렌드가 아닌 더 깊은 것에 뿌리를 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다름 아니라, 지속적인 복음의 진리와 선조의 지혜에 근거를 두는 믿음이다.
<다음 호에 계속>
by Joe Carter, TGC
11.02.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