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권사님께 식사라도 대접할 요량으로 오랜만에 찾아 뵈었습니다. 마주 앉자마자 권사님은 눈물을 글썽이며 토로하셨습니다.
“목사님, 내 인생이 왜 이래요? 내가 뭘 그리 잘못했나요. 평생 교회를 세우고 헌신하고, 새벽기도 한 번 빠짐없이 내 나름대로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한가요? 아니, 아버지께서 대체 왜 이러셔요?”
작심한 듯 쏟아내는 원망 섞인 푸념에 제 가슴도 먹먹해졌습니다. 이야기를 찬찬히 듣고 보니 참 답답할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신 권사님 연세가 벌써 여든 다섯이 넘으셨으니, 자녀들 나이도 어림잡아 짐작이 가시지요. 그중 아들이 젊어 이혼의 아픔을 겪고 홀로 손주를 키우며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가업으로 물려받은 빌딩을 관리하며 남부럽지 않게 살던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팬데믹이 오면서 사업이 어려워지고 빌딩 유지조차 흔들렸다고 합니다. 그저 시절이 어려워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났는데, 그 여파인지 얼마 전 아들이 경찰에 연행되어 감옥에 가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들도 나름 주일 잘 지키고 신앙생활 잘했는데, 왜 내 황혼의 나이에 이런 감당 못 할 일이 닥쳐요. 몸도 예전 같지 않아 하루하루가 고통인데, 회장직에서 물러나니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또 왜 이리 많은지…. 내가 가야 할 때가 됐나 하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듭니다.”
얼마나 위로가 고프셨으면 이토록 서럽게 우실까 싶어 가만히 주름진 손을 잡아드렸습니다. 권사님의 눈물을 보며, 얼마 전 어느 신문에서 읽은 ‘고통량 불변의 법칙’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인생에는 누구나 평생 겪어야 할 고통의 양이 정해져 있다는 논리입니다. 누구는 고통이 많고 누구는 적은 것이 아니라, 그저 시기가 다를 뿐이라는 것이지요. 젊어서 고생을 많이 하면 노년이 편안하고, 젊은 시절을 평탄하게 보냈다면 나이 들어서 그 채우지 못한 고통의 양을 마저 채워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일견 그럴싸해 보입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권사님, 그동안 평안하셨으니 이제 남은 고통이 찾아온 겁니다. 이 시간만 잘 지나면 고통의 양이 다 채워져서 다시 복이 올 겁니다.”라고 위로해야 할까요? 당장은 귀에 달콤할지 모르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이 말은 참으로 무서운 함정입니다. 자칫 하나님을 그저 인간에게 기계적으로 고통을 할당해 놓고, 그걸 다 채우나 못 채우나 감시하는 분으로 오해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고통은 결코 기계적인 할당량을 채우기 위한 맹목적인 형벌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라고 권면합니다.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이루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롬 5:3-4). 하나님은 고난이라는 시간을 통해, 택하신 자녀들의 모난 부분을 깎아 내시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온전히 빚어 가십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만약 우리 인생에 정말로 ‘고통량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어떨까요? 단, 그것이 우리가 억지로 채워야 할 ‘형벌의 양’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님의 모습’을 온전히 닮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은혜의 분량’이라면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겪는 이 시련의 시간은 고통의 할당량을 채우는 억울한 형벌이 아니라, 내 안의 불순물이 녹아내리고 그리스도의 성품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은혜의 과정일 것입니다. 저는 섣부른 정답을 내미는 대신 듣는 내내 권사님의 손을 붙잡고 속으로 가만히 기도했습니다.
이 아프고 막막한 시간이 다 지나고 났을 때, 권사님과 그 아드님의 삶에는 얼마나 맑고 따뜻한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져 있을까요. 오늘 우리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는 이 고난은,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롬 8:28). 다시 한번 곱씹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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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8.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