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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마가복음 2장 5-12절

중풍병자의 친구들이 지붕 위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예수님이 있는 곳으로 달아 내리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때 주님은 본문 5절에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중풍병이 나으라”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앞서 나병환자는 그냥 “깨끗함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중풍병자에게는 병의 언급은 없고 죄사함을 선포하셨습니다. 이 사건으로 거대한 파장이 일어납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사람 중에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참여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가만히 있다가 사건이 터지자 시비를 걸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점점 퍼져나가고 영향력이 커지니까 위협을 느낀 부류가 있었습니다. 소위 그 당시 기득권자들,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들으러 온 사람이기보다는 흠집을 잡기위해 왔습니다. 

서기관들이 시비를 거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죄사함을 선포한 것으로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의 권위로 당신의 죄 사함을 선포하고 있냐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는 일이 당시에 누가 행하던 일입니까? 그 일은 제사장들의 영역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죄를 사하려고 하면 짐승을 잡아 속죄의 제사를 드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는 것은 당시의 종교체제 자체를 뒤흔드는 일입니다. 신성모독도 모독이지만 그들의 자리, 그 시대의 기득권으로 있던 종교지도자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전의 제도가 파괴 직전에 놓였습니다. 제사제도는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만 유효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림자가 아닌 실체이십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왔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이나 제사장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안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달랐습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오실 길을 평탄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몰려가고 이목이 집중될 때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와 자신과의 관계설정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 제도권에 있던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예수를 그냥 둘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돌풍을 일으키시자 질투하며 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본 것이 아니라 없어야 할 공공의 적으로 보았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사탄의 나라가 맞섭니다. 사탄은 공생애 출발에서부터 예수를 공격합니다. 사탄은 무엇을 싫어합니까? 그리스도가 증거되는 것을 싫어하고 교회가 왕성히 일어나는 것을 거부합니다. 1세기를 보면 교회가 강력하게 일어났을 때 로마의 황제들이 위협을 느끼고 교회를 핍박합니다. 로마시대의 10대 박해는 유명합니다. 그러나 3세기에 이르러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로마를 국교로 지명하면서 핍박은 사라집니다. 그때부터 기독교를 믿는 사람은 소수가 아닌 다수가 됩니다. 핍박의 시대는 지나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수혜를 입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수혜자가 될 때부터 기독교는 약화되기 시작합니다. 

요즘 코로나 팬데믹으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교회 나가는 것도 은근히 방해하고 눈치를 준다고 말합니다. 모이는 것들이 어려움을 겪는 시간이 올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기독교는 어려움이 올수록 신앙이 꽃을 피웁니다. 좋은 환경을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좋지 않은 상황 속에서 믿음이 더 순수해지고 정금 같이 빚어지기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핍박과 적대적인 일들은 공모를 통해 일어납니다. 진리를 따라 살아가고 복음이 왕성하게 일어나면 그때부터 반대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박해가 있다는 것은 교회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역사 앞에 늘 도전을 받아왔습니다. 교회도 그렇지만 개인의 신앙도 언제나 도전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마귀는 그냥 순수히 예수 믿고 신앙생활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대놓고 반대하고 핍박하는 것을 그렇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체가 분명하고 분별이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묘하게 파고들어 오는 유혹은 무섭습니다. 마귀가 뿔을 달고 나타나면 싸우기 쉽지만 광명한 천사로 나타나면 어렵습니다. 적인지 아군인지 정체를 숨기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대가 그렇습니다. 분별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육체를 입고 오신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음을 강조할 때 인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셨습니다. 인자는 결국 십자가와 연결됩니다. 주님은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메시야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리스도는 단순한 설교자나 치료자가 아닌 구원자이십니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는 선포하심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죄사함을 받아야 온전한 치유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병의 치유보다 죄의 용서를 더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실제로 근원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죄와 질병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모든 질병은 아담의 범죄로부터 출발되었습니다. 주님은 중풍병자의 질병만 보신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영혼까지 바라보셨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병 자체가 낫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렇지만 병 낫는 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죄 문제는 영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보시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을 다루십니다. 질병으로 고통하는 자들을 보시면서 고통의 진정한 원인은 죄 문제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이 중풍병만 낫게 하시고 죄 사함을 선포하지 않았다면 치유 사역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은 인간에게 진정한 필요가 무엇인지 알려주셨습니다. 인간이 느끼는 차이와 주님이 느끼시는 필요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병 낫는 것을 기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진짜 기적은 죄 사함을 받는 일입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가 죄의 문제를 다루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죄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선을 행하고, 고행을 해도 안됩니다. 

종교개혁가인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기 이전에 끝없는 갈등과 번민 속에 살았습니다. 아무리 수행을 해도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갖는 상식적인 관점은 죄를 지으면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런데 무슨 재주로 인간이 스스로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있겠습니까? 마틴 루터는 해결하기 위해 처절한 시간을 보내지만 해결되지 않습니다. 죄는 인간의 편에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는 마치 빚과 같습니다. 때로는 빚을 갚지 못하면 노에로 살아야 합니다. 죄의 끔찍함입니다. 죄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고 심판을 불러왔습니다. 하나님은 죗값으로 죽어야할 인간을 대신하여 짐승이 대신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도는 한시적이고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단 한 번에 속죄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신 것은 이제 새 시대가 왔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도울 때가 있습니다. 질병의 문제이든 경제적 문제이든 돕습니다. 아프리카 땅을 위해서도 돕고 사랑의 박스를 만들어 이웃을 돕습니다. 교회가 많은 일을 하기도 하지만 교회가 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사역은 딱 하나로 압축됩니다. 바로 구원사역입니다. 주님은 오늘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치르신 가장 값비싼 대가입니다.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푸는 일입니다. 

요즘 코로나로 인해 치료제 백신 개발에 여러 나라가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에 의하면 백신개발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또 다른 바이러스가 출현하기 때문입니다. 생태계의 백신 등 다양한 문제 해결을 이야기하지만 쉽게 해결될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 역시 인간의 죄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뒤틀려져 있으면 인간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지구는 파괴되고 세상의 오염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부분적이고 지역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를 씁니다. 중풍병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병이 낫는다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암 투병을 하다가 나은 감격도 오래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병이 낫는 일이 눈에 띄는 일이기 때문에 관심도가 높습니다. 죄 사함을 받는 일은 금방 눈에 띄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가볍게 여깁니다. 그러나 새로운 삶은 반드시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몸의 치유와 죄 용서의 문제를 같이 다루십니다. 온전한 치유는 몸의 치유와 영의 치유가 같이 일어나야 합니다. 전인적인 치유가 중요합니다. 죄 문제를 두고는 전인적 치유가 불가능합니다. 죄의 위력이 가공할 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끊임없이 인간의 삶을 파괴 합니다. 정신적인 것만 아니라 몸과 마음, 관계를 망가뜨리고 깨뜨립니다. 

세상을 보면 불법이 난무합니다. 정의가 사라지고 질서가 무너지고 세상 곳곳에 균열이 일어납니다. 어디든 평화가 없는 모습입니다. 수많은 이슈가 등장하고 각자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갈수록 더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성경의 대표적인 재앙이 전쟁과 기근, 전염병입니다. 그런데 이 셋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는 인간의 죄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고통 하는 코로나 팬데믹도 인류에게 무엇인가 강력한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죄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된 죄의 역사는 인류를 비참한 상태에 빠뜨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 22절에서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게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만이 온전한 치유자가 되십니다. 예수 백신이 최상의 해결책입니다. 

그리스도는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온 것은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곁길로 빠지지 말고 죄 문제에 초점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십니까? 우리는 왜 주님에게로 나오는 것입니까?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구원자이십니다. 

다른 것들은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죄 문제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죄를 사하실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입니다. 주님에게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진 존재가 됩니다. 그때 기쁨이 넘치고 평강이 넘칩니다. 

마지막으로 본분 11-12절에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놀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은 죄사함을 선포하실 뿐만 아니라 중풍병자를 낫게 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라’ 그리스도를 만나면 회복이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드러누워 있던 인생이었다면 이제 자기의 침상을 들고 일어나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살아가는 은혜가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08.01.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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