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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교회 1000년 - 어둠에 잠긴 구속역사의 현장 (46)

형제단 창시자 후르트 ‘devotio moderna’, 북유럽 르네상스 핵심사상 돼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와 devotio moderna 만나 강력 개혁운동화

연속성과 불연속성  

역사의 흐름은 반드시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염두에 두고 살펴야 한다. 이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과연 과거의 영향이 어떻게 지속 또는 중단되었는지에 대한 여부를 판단하는 작업이다. 세상의 일은 대부분 새로운 상황과 부딪히며 진행되기 때문이다.   

중세 르네상스도 예외가 아니다. 이탈리아 국가도시를 중심으로 출발한 르네상스는 형식과 전통을 중시하는 중세의 틀을 깨고 개인의 독창성을 중시하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탄탄한 부와 군사력을 누리던 이탈리아가 새롭게 등장한 주변 강대국의 수하에 놓이면서 그들의 자랑거리였던 르네상스도 함께 쇠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르네상스의 기본정신, 즉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수용하려는 시도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의 내용을 답습하려는 시도가 아닌, 자국의 토양에 맞추어 자체적인 형태로 발전되는 특징이 생겨났다. 특히 화란과 독일을 중심으로 발전된 북부 유럽의 르네상스는 남부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색다른 독특한 형태로 발전되었다. 

 

예술과 종교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에 활동하였던 예술가들은 인간의 몸이 아름다운지를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인간의 감정을 사실대로 표현하는 예술가의 기교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의 작품들은 대부분 성경의 내용과 연관된 주제들이었다. 외면적으로나마 종교적 형태를 유지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북부 유럽의 예술가들의 작품은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독일의 경우 연속성이 강하였다. 대표적인 화가로, ‘기도하는 손’으로 널리 알려진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를 꼽을 수 있다. 1494년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방문하여 머물면서 르네상스 미술을 접한 그는, 귀국 후 독일에 새로운 회화양식을 전달하기 시작하였다. 1505년 두 번째 베네치아를 방문하여 르네상스 대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뒤 뉘른베르크 시를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의 그림과 판화, 그리고 조각은 독일의 고딕과 남부 르네상스의 조화를 통한 독특한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뒤러는 인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 하면서도, 주로 종교적인 내용을 주제를 선정하였다. 그는 마르틴 루터의 개혁사상에 동조하기도 하였다. 

화란의 경우는 달랐다. 이곳 예술가들은 남부 르네상스와 달리 짙은 종교적 성향 대신, 종교적 상징을 세속적인 풍경에 담는 작품들이 주를 이뤘다. 이로서 화가들은 주로 서민들이 실제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화폭에 담으려 했다. 나아가서 세속적 풍경화와 정밀화 작품이 그들의 주된 관심거리였다. 

 

제라드 후르트  

비록 화란의 예술가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와 달리 세속적 작품에 더욱 관심이 있었지만 화란을 중심으로 인문주의 학문의 가치에 대한 재발견과 함께 북부 르네상스의 강력한 종교적 운동이 시작되었다. 인간의 본능적 자유를 강조하였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와 달리, 향후 북부 유럽 르네상스가 영적으로 암흑시대를 맞았던 중세교회의 영적 각성과 도덕적 개선을 중시하는 개혁운동으로 전개되도록 하는 초석이 되었다. 그 중심에는 ‘공동생활형제단 (Brethren of the Common Life)’을 창시한 제라드 후르트(Gerard Groote, 1340-1384) 라는 인물이 있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던 후르트는 젊은 날의 방탕한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기로 작정하였다. 자신의 죄를 깊이 자각하는 시간을 경험한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그의 회심은 한 개인의 경험 이상이었다. 많은 유럽인들의 신앙을 자극하여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자들을 세우는 기폭제가 되었다. 

회심 경험 이후 그는 세속적인 삶조차 포기하였다. 자신의 집을 가난한 자와 결혼하지 않은 여인들에게 개방하고, 본인은 2개의 방만 사용했다. 많이 지닌 것이 영적 삶에 방해가 된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파리대학에서 공부를 하여 교회법에 정통한 자였다. 그럼에도 성직자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집사의 신분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하려 하였다. 

1370년경 그의 설교가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성직자들의 부패에 대한 비판도 주저하지 않았다. 평신도들에게는 인기가 있었으나 성직자들은 그를 배격하였다. 그럼에도 후르트는 항상 자신을 교회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신의 주관하는 새로운 영적운동이 교리적으로 정통성을 잃지 않아 반드시 교회로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회심  

후르트를 추종하던 자들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내적 자아에 집중하며 그리스도와 개인적 관계를 맺는 것을 중시하였다. 후르트는 탁발수도승과 달리 구걸을 절대적으로 금지시켰고, 그 대신 내적경건을 위해 직물제조와 문서복사 등의 노동을 통한 수입에 의존하도록 하게 하였다. 이 공동체가 초창기에는 비밀스레 모였으나 1390년경부터 화란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후르트는 인류가 방향성을 상실하였고, 교회도 개혁이 절실하다고 확신하였다. 이런 영적 위기를 타파할 수 있는 방법으로 ‘devotio moderna(오늘에의 헌신)’을 선택하였다. 이는 향후 북유럽 르네상스 운동의 핵심적 사상이 되었다. 

devotio moderna의 핵심은 ‘진정한 회심’이다. 단순히 교회에 출석하거나 종교적 관심을 갖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향으로 전환하여 영적인 일을 실천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모범이 항상 공동생활형제단의 삶과 경건에 대한 가르침과 실천의 중심에 있었다. 회심이란 한순간이 아닌 성도의 신분으로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서 영적인 순수성을 지키고 더욱 영적인 삶을 추구한 것이다.   

공동생활형제단이 교회역사에 끼친 가장 커다란 공헌은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에 관심을 갖고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긴 것에 있다. 교회는 물론 주위에서 공동생활형제단에 대한 공격이 끊이지 않았으나, 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자신들의 전통을 이어갈 수 있도록 devotio moderna를 기본 과목으로 하고 인문주의 과목을 함께 가르치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결국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devotio moderna가 함께 만나 조화를 이루면서 강력한 개혁운동의 양상을 갖추게 되었다. 진정한 경건을 위해 경건의 내용을 중시하게 되면서 글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신앙에 큰 유익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중세교회의 전통도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것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더 이상 이런 경건생활이 성직자들만의 소유물이 아님을 인식하고, 평신도들도 성경뿐 아니라 고대 저자들의 경건서적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북유럽에 부유한 자들이 많아졌다. 경건을 위해 책을 소유하는 자들이 늘어났다. 여성들까지도 책을 읽으려는 열망이 더해졌다. 인쇄기가 발명된 후에는 별도로 인쇄소를 세워 적극적으로 devotio modera를 확산시킨 결과, 화란의 주요 도시의 종교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북부 유럽 르네상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의 저자로 알려진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1380-1471)는 형제공동체가 실시한 교육이 낳은 귀한 열매 중 하나이다. 그는 어린 소년 시절 형제단 회원에게 devotio moderna를 통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의 교육받았다. 그러므로 후르트의 가르침을 토대로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저술한 것이다. 이 외에도 아 켐피스는 후르트를 포함한 형제단에 속했던 인물들의 자서전을 기록함으로서 그들의 업적을 후대에 남기려 하였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전체 4부 즉, ‘영적 생황에 유익한 권면’, ‘내면을 향한 유익한 권면’, ‘주님만이 주시는 내적 위로’, 그리고 ‘주님과의 거룩한 하나 됨’으로 구성되었다. 그는 인간의 타락과 이에 따른 무능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과 은혜의 필요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그러면 누가 자신을 성찰하고 그리스도를 앙망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와 같이 진정으로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자이다. 즉 분명한 회심의 경험을 한 자이다. 성경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인쇄된 책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이 devotio moderna는 북부유럽 르네상스의 전형이 되어 널리 확산되어갔다. 

독일의 경우를 살펴보자. 독일의 15세기 인문주의자들은 나름 16세기 종교개혁의 길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인문주의와 기독교신앙 사이에 갈등이 없다고 확신하고, 공동형제단의 교육방침을 수용하였다. 초기 독일인문주의자들은 devotio moderna를 변호하거나 친히 그들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종교개혁 전야에 활동하던 인문주의자들은 보다 분명하게 중세 로마교회에 대하여 비판적 태도를 취했다.  

이탈리아 플로렌스를 방문하였던 요한 르흘린(Johann Reuchlin, 1455-1522)은 독일교회에 히브리어와 헬라어 연구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 종교개혁자 루터 역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르흘린은 교회와의 분리를 원하지 않았기에, 종교개혁을 지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로마교회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특히 루터와 함께 했던 종교개혁자 필립 멜랑흐톤(Philip Melanchthon, 1497-1560)이 르흘린의 조카였다. 대부분 독일 인문주의자들이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교의적 전통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독일의 종교개혁은 국가주의적 요소와 함께 추진되었기에 독일 인문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북부유럽 르네상스의 특징이 종교개혁시대에도 연속된 듯하다. 북유럽의 여러 국가들 중, 유독 화란을 중심으로 요한 칼빈의 종교개혁 정신이 크게 발전된 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강조된 경건과 삶을 중시한 개혁자이다.   

covenantcho@yahoo.com

 

10/12/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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