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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김창순(1904-1977)

김창순은 1904년 10월 5일에 태어났다고도 하고, 이듬해 11월 5일에 출생했다고도 하는데 함경북도 영흥 옥기에서 김태현과 장유완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함남 안변에서 초등학교를 끝낸 그는 개성 송도 한영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했다. 

1926년에 하와이로 이주하고 호놀룰루 이올라니 중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한 후 1930년 4월에 윤성현과 함께 나성을 거쳐 미국 캔사스주 엠포리아에 있는 캔사스 주립사범대학에 입학하여 1932년에 졸업한 후 엠포리아 대학에서 경영학으로 1933년에 졸업하였다. 그해 여름 학기에 같은 주 오타와에 있는 침례교 학교인 오타와 대학교에 입학하여 1936년에 졸업했고, 같은 주 숀니에 있는 중앙침례교 신학교도 1936년에 졸업했다. 이후 나성으로 이주하여 남가주 대학에 입학했다. 

김창순의 관심은 두 가지였다. 그가 1930년에 신한민보에 기고한 ‘건설과 국어학교’와 ‘미국 출생의 우리의 청년’에서 주장하는 대로 2, 3세 미주한인 청년의 국어를 통한 민족건설에 있었다. 그리고 1939년 11월 12일에 이창희와 장 S.Y.와 함께 설립하고 본인이 회장이 된 한미문화협회였다. 그런데 호놀룰루에서 목사로 청빙을 받게 된다.

 

1940년 호놀룰루한인기독교회 부임, 1956년 워싱턴 제일한인침례교회 개척

목회외 한미문화협회 사역에도 힘써  1943년 하와이대학에 한국도서실 설립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

 

김창순은 1940년 9월에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에 부임했다. 그런데 그의 목회는 매해 평가하여 재계약하는 조건이었다. 1941년 교회 임원으로 부사에 손노듸와 김학성, 탁사에 이재연, 이원순, 강영복, 양유찬과 문인화, 재무에 최성대, 황원태와 손승운, 주일학교 교장에 김학성, 서기에 김유실, 집사에 정순이, 이영옥, 조매륜, 백인숙, 전영복, 민함나, 심영선, 이복수, 김유실, 안득은, 김엘리사벳과 조해나 그리고 평신도회장에 김광재였다. 

김창순은 그해 한인선교부 연회에 참석했고, 거기서 민함나와 김국겸과 함께 분묘 심방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1월에 호놀룰루 한인기독교회에서 개최한 연회는 그의 안을 받아들여 연회가 청년 사역과 문화 사역에 주력하여 연회 내 각 부처의 책임을 청년에게 맡기고 교회 임원회도 청년 임원회와 장년 임원회로 나누었다. 

이듬해 김창순은 “죽도록 충성하자”라는 표어를 내걸고 새해 축하메시지를 통해 많은 교우에 비해 교회공간이 부족하고 청년들을 위한 장소가 없음을 지적하면서 별도의 주일학교 설비와 청년회관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런데 박삼용 건축사가 설계한 청년회관은 4, 5천 명의 청년이 들어갈 수 있는 건물로 아래층에는 운동실이 있고, 2층에는 교실과 기념 사무실 등이 있는 총 2만7천 달러의 목조건물이었다. 3천 달러 기부자에게는 방에 이름표를 붙여주는 방식으로 모금하여 10,000달러만 더 모금하면 되었는데 전쟁 중이라 이 청년회관은 지어지지 않았다. 

그해 3월 김창순은 교회건축 빚 5,000여 달러를 갚기 위하여 특연을 노력했다. 주일 아침예배는 한국어와 영어 등 언어별 예배를 따로 드렸는데 한국어예배의 경우 각 순서에 소요시간을 정해둔 점은 획기적이다. 기도는 5분간, 광고는 3분간, 설교는 15분간이었다. 그때의 기도가 오늘날의 기도보다는 2분이 길었고, 그때의 설교는 20분에서

 25분을 할당하는 오늘날의 설교보다 짧았다.  

그해 5월에 김창순의 설교가 ‘태평양 주보’에 실렸다. 그는 ‘기독교회 장래’라는 제목 아래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는 재정과 인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위의 설교를 통하여 이후 5년 재무계획을 세워 청년회관을 건축하고 임대 가옥을 더 지어 교회 재무를 탄탄히 하고자 했다. 그런데 김창순 목사가 임원회 동의나 임원의 허가 없이 경비를 쓰고 청구서를 교회에 보내는데 항의하여 재무를 맡은 김영기와 황원태가 재무직에서 사임하였다. 이에 이유섭과 문인화가 그들의 후임으로 선정되었는데 김창순의 재무 사용 방법이 개선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1901년에 내한하여 목포와 전주에서 사역한 루터 O. 맥커천(마로덕)이 1941년에 일제에 의해 추방되어 도미하였는데 아펜젤러 목사의 소개로 본 교회 부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1941년 11월 13일에 본 교회 한영 연합예배에서 강대상에 섰다. 그는 영어와 한글로 능숙하게 설교했다. 그는 한인 기독학원에서 영어와 성경도 가르쳤다. 그해 12월 7일 일본은 선전포고조차 하지 않은 채 오아후 섬 진주만에 정박한 미국 태평양 함대를 기습 공격하였다. 당시 중립이었던 미국이 태평양전쟁에 뛰어들자 교회 청년이 징집되어 전쟁터로 향했다. 김창순의 청년사역은 청년회관을 넘어 청년의 안전이라는 다른 국면을 맞았다. 

신흥국어학교는 계속되었다. 1941년 말의 1년 총수입은 604달러18센트지만 총지출은 609달러 79센트로 5달러의 적자를 냈다. 그러나 2, 3세에게 한글교육은 중단할 수 없는 교회의 사명이었다. 이듬해 2월 16일에 38세인 김창순도 제2차 세계대전 징집서류를 제출했다. 당시 그가 친필로 적은 인상착의를 소개한다. 5피트5인치 곧 165cm의 키, 갈색 눈, 검정 머리, 연갈색 얼굴에 체중은 145파운드 곧 65.8Kg이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천연두로 인한 흔적이 있었다고 적었다. 

1942년 6월 28일 주일에 미 육군과 해군을 위한 특별예배를 드렸다. 본 교회 민함나, 김봉순, 이유실, 윤덕아, 김노듸, 김순남, 이원순이 300여 명의 군인에게 점심식사를 제공했고, 음악 순서도 마련하였다. 본 교회 청년에 대한 징집 명단이나 사망 또는 부상에 대한 보고는 없다. 민간방위청에서 태평양전쟁 중 민간의 사기를 돕는 목적 하에 조직한 한인 사기부(Korean Committee Morale Section) 10명 위원에 대한 부인 보조회를 대표하여 김노듸가, 태평양주보 편집인 김영기 그리고 한족 연합위원회 회장 이원순 등 본 교회 교인 3명이 활동했다.

무엇보다도 이 해에 교회건축 빚을 완전히 갚았다. 김창순이 부임한 다음 달인 1940년 9월에 3,300달러를 갚은 데 이어 1942년 7월 15일부터 한 달 반 동안 특별 모금을 하여 7,040달러를 갚았으며 약 5,000달러가 적립되었다. 이로써 입당한 지 4년4개월에 헌당예배를 드렸다. 건축 빚 상환의 주역은 민함나, 김종술, 이유실, 문인화, 최경애, 이묘옥, 남순남, 전영옥, 손노듸, 정순이, 손승운, 심영신, 김복덕, 이원순, 이영옥, 양정선, 서복수, 정운서, 김상범, 배일진, 김제희, 김신복, 김성률, 윤덕아, 장얼리하, 이봉운, 심영근, 윤싸라 등 건당특연위원이었다. 

1942년 교회 재정의 총수입은 13,229달러였고 지출이 12,386달러로 잔액이 800여 달러여서 그만큼 재정적 여유가 있었던 것은 김창순의 인재 등용과 무관치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김창순이 남긴 마지막 글, ‘천국 가는 길’의 한 부분을 아래에 소개한다. 

“실행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믿는 것을 일에 나타나게 할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이르게 하는 것을 일로써 해야 한다. 실행 없는 믿음은 나와 남을 유익하게 못한다. 실행은 곧 소금이고 빛이다. 이 소금과 이 빛이 곧 천국 가는 길이다.

김창순의 사역에는 목회 외에 한미문화협회 사역도 있었다. 그가 하와이로 오기 전 나성에서 조직한 한미문화협회 회원을 이곳에서도 모집했고, 한국도서관 설립 장학기금을 마련하였다. 그는 1943년 5월에 하와이대학에 한국도서실을 설립하였는데 이는 미국 대학 중에서 최초였다. 

김창순의 도움으로 부인협동회가 1944년 6월에 부인들의 친목조직으로 결성되어 김엘리자벳이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50여 명의 회원이 회비를 각출하여 회원 장례조화나 야외예배 경비 등에 지출하였고 저축금이나 특별 모금을 통해 교회 청년관 건축기금으로 기부했다.

김창순은 건강상 이유로 목회를 사임하게 된다. 그는 1944년 7월 30일에 마지막 예배를 인도했다. 그의 사역은 만 4년간이다. 그 후 그가 하와이에서 휴양하면서 한미문화협회의 지난 5년간의 사업 보고를 신한민보에 실었다. 1947년 3월 19일에 호놀룰루를 떠나 나성으로 가서 3427 맥크린톡 애비뉴에 짐을 풀고, 이곳에서 목회를 계획했으나 다음 달 7일에 나성을 떠나 한국으로 귀국했다. 

 

워싱턴 제일한인침례교회

 

한국으로 귀국하였다가 김창순은 1948년에 서울의 한국 침례교 진흥본부 사업차 도미하였는데 1951년에 미국 수도 워싱턴 디시로 이동했다. 화부 한인감리교회가 조직된 그해 10월 14일 이전이었다. 그는 3200 Rittenhouse Street, NW, Wasington D.C.의 주택을 구매하고 개조하여 1956년 5월 6일 아침 11시에 이곳에서 30명 정도의 교포들이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 워싱턴DC에서 두 번째의 한인교회인 ‘미국제일한인침례교회’를 설립했다. 이날 그의 설교 본문은 시편 119:9이었는데 젊은이를 위한 교회임을 보여준다. 본 교회는 미주에서 처음 설립된 한인침례교회이기도 하다. 최초의 세례교인은 정형외과 전문의 훈련을 받기 위해 뉴저지에서 온 심선식이다. 그가 김치를 사러 한국가게에 갔다가 김창순을 만났고, 여기 큰 한인교회가 있지만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고자하니 함께 하자는 김창순의 권유에 그가 따랐다. 그해 11월 본 교회는 워싱턴DC 침례교회 콘벤션에 가입했다. 이 무렵 워싱턴에는 200여 명의 한인이 거주했다. 다음 달 그는 목회일선에 나서지 않고, 뉴욕 유니온신학교에서 공부하던 강원용 목사를 설교목사로 초빙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그의 귀국으로 1958년에 서울 종로침례교회 안병국 전도사가 부임했다. 

김창순은 1977년 5월 19일에 미국 일리노이스에서 향년 73세로 소천하여 같은 주 레이크카운티 내 레이크 포리스트에 있는 레이크 포리스트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damien.sohn@gmail.com

09.26.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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