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뉴저지밀알선교단 단장 강원호 목사

장애인 선교 “복음과 사랑의 실천” (11)

5. 사역자는 긍휼의 사람이어야 한다

 

긍휼은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무엇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낮은 자리로 내려가 함께 고난을 겪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 긍휼이 여기는 자는 힘이 있는 위치이고 긍휼을 받는 자는 힘이 없는 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힘이 없는 자는 긍휼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니다. 긍휼의 참 뜻을 이해한다면 약한 자도 얼마든지 긍휼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장애인도 긍휼의 삶을 살 수 있다. 나우웬은 이렇게 말한다. 

“긍휼을 뜻하는 영어 단어 compassion은 라틴어 pati와 cum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두 단어를 합치면 ‘함께 고통 받다’ 라는 의미가 된다. 긍휼은 우리에게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연약해지고 상처입기 쉬운 자들과 함께 상처입기 쉬운 자가 되며 힘없는 자들과 함께 힘없는 자가 될 것을 요구한다. 상대방과 함께 고통 받는다는 의미로 긍휼을 이해하게 되면 때로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거부감 내지는 심하면 저항감마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보통 힘 있는 신이 사람의 고통을 제거해준다고 생각한다. 다른 종교의 모든 신들은 다 그런 종류의 신들이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고난을 당하셨다. 고난을 함께 당하는 신은 인간 머리에서 나올 수 없다. 세상은 타락이후 지배와 경쟁의 구조로 빠져 들어갔다. 그래서 힘이 최고라는 미신을 믿게 되었다. 긍휼은 단지 강자가 약자에게 베푸는 동정 정도로 생각되고 긍휼을 받는 사람은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있다. 사람들은 세상을 적자생존의 전쟁터로 알고 있다. 그 구조에서는 긍휼조차도 경쟁의 도구가 되어버렸다. 

정치인이 선거철에 빈민가를 찾아 봉사 활동을 하고, 기업이 홍보를 위해 기금을 내놓고 이런 활동은 긍휼을 자신의 이익으로 생각한다고 오해를 받는다. 그 긍휼은 강자가 약자에게 주는 부스러기일 뿐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보여주신 긍휼은 그런 긍휼이 아니다. 고난당하는 자와 함께 함으로 자신도 고난을 겪으면서 나누어주셨다. 장애인 사역자는 장애인과 함께 검소하게 생활하며 함께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하고 일해야 한다. 

 

제 7절  3장 결론

 

헨리 나우웬이 일평생 찾았고 마침내  데이브레이크 장애인 공동체에서 장애인들에게서 확인했던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의 진리는 루터가  젊은 시절부터 고민했던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식, 불안(anxiety)과 비슷하다. 루터가 자신의 공로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얻은 평안을 발견했다. 

헨리 나우웬도 일평생 조건 없는 사랑을 찾아 헤맸는데 그것은 인간의 공로나 행위가 아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불러주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 진리와 통하는 부분이 있다. 

헨리 나우웬은 이렇게 칭의론적인 복음으로 자신의 공로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로 내적 평화를 찾았을 뿐 아니라 이웃사랑에도 적극적 관심을 가져 루터 킹 목사의 인권운동, 페루 빈민가 활동, 생의 마지막은 장애인 공동체에서 사랑을 실천했다. 

결론적으로 생의 마지막 10년을 장애인들과 함께 살면서 칭의론적인 복음뿐 아니라 장애인의 육신의 고통, 사회적 차별, 가난의 문제를 위해 힘써왔다고 생각해볼 때 그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miju92@gmail.com

07.17.2021

Leave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