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시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년에 세 차례 절기를 지키도록 명령을 해 주셨습니다. 그 절기가 바로 유월절(무교절)과 맥추절(칠칠절) 그리고 수장절(초막절, 장막절)이었습니다. 그런데 현대 개신교 교회는 성탄절과 부활절, 추수 감사절을 주로 귀한 절기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추수감사절은 구약시대에 지키고 있던 수장절과 연관이 됩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절은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건너왔던 청교도들이 숱한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 새로운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은 다음 그해 가을에 하나님께 추수를 감사하면서 감사예배를 드린 것에서 기인되고 있는 절기입니다. 이런 전통에 따라 미국에서는 몇 차례의 날짜가 바뀌게 되어 11월 넷째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면서 하나님께서 한 해 동안 내려 주셨던 은혜와 축복을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농경시대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한 해 동안 내려 주셨던 여러 가지 은혜와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그 모습은 참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감사를 회복할 수 있고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다시 조명해 볼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1세기 위대한 전도자 바울 사도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감사에 관해 귀한 교훈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 사실이 그리스도인들의 기본 행동강령이라고 알려진 말씀 가운데 내포 되어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렇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살전 5:16-18). 그래서 그런지 바울 사도는 여러 차례 반복해서 감사 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 말씀은 골로새서 교인들에게는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 2:6-7) 계속해서 그런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은 주로 골로새서 3장 말씀을 통해서 계속적으로 명령합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라”(3:15)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3:16)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3:17) “기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깨어 있으라”(4:2) 이런 감사의 삶은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의 뿌리를 내려야 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사가 기분이나 감정 환경에 따라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좋은 일이 있으면 감사하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조그만 어려운 일이나 힘든 일이 생기면 금방 마음이 바뀌어져서 원망과 불평으로 변하는 일이 많습니다.
식물이 어디에 뿌리를 내려야 되는지에 따라서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 입니다. 식물이 메마른 땅이나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리게 되면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고 몇 년이 되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다가 말라 죽는 경우도 있고 사람들에게 짓밟힘을 당하다가 결국 잘림을 당하고 불쏘시개로 쓰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씨 부리는 비유를 주시면서 옥토에 떨어진 씨라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교훈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께서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살려고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를 내릴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람들은
첫째,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은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시 1:3)
시편 기자 다윗은 첫 편의 말씀을 통해 의인과 악인을 구분해 주고 있는데 의인들은 복 있는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기 때문에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게 될 것이다”(시 1:3)라고 노래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철을 따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 것 같으니 하는 일이 모두 형통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은 가뭄이 오고 흉년이 들어 궁핍할지라도 그런 가운데서도 감사의 조건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절기에 내가 어디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를 깊이 살펴보아야 할 시점입니다. 세상적인 쾌락이나 명예, 권세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람들의 결과는 너무 명약관화하지 않습니까? 변덕 부리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가려고 하면 먼저 우리 자신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될 것입니다.
둘째, 여호와의 집에 심겨져 있는 나무와 같기 때문입니다.(시92:14)
역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아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양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며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여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나”(시 92:12-14) 여호와의 집에 심겨졌다는 것은 오늘날의 표현으로는 교회 안에 심겨졌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 심겨져 있는 사람과 교회 밖에 심겨져 있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많이 다릅니다. 특별히 노년기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다른 면이 두드러집니다. 교회 안에 뿌리를 내린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것보다 남들을 섬기며 봉사하는 쪽으로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선교나 구제 섬김 쪽에 신경을 쓰다 보니 오히려 노년기를 더 의미 있게 보내게 됩니다. 마음속에 감사가 자리 잡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밖에 있는 사람들은 소일거리를 찾지 못해 도박이나 장기, 바둑 같은 것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감사를 잃어버린 모습들입니다. 사람들의 수명이 연장되고 있기 때문에 노년기를 어떻게 보내야 될지도 과제가 되고 있는 시점입니다. 여호와의 집에 심겨진 나무로 계속 뿌리를 내리며 사는 삶이 참된 감사를 회복하는 길입니다.
셋째, 범사에 감사 할 수 있게 됩니다.(살전 5:18, 합 3:17-18)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를 내린 사람은 범사에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범사라는 말은 모든 여건(all circumstances)을 말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어려운 일이나 충격적인 일을 만날 때는 감사한 마음보다는 원망이나 불평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판단으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감사가 차원이 높은 감사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감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스도 안에 뿌리를 내린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의 삶을 조명해 본다면 우리들의 눈으로 보면 고난과 환란의 연속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도 갇히고 태장도 맞고 배가 파선 당하는 어려움도 당하고 굶주리고 헐벗고 목마름으로 인해 갈증을 당하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감사하며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살아오면서도 감사했기 때문에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약시대 활동하던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던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듣고 자기의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는 소출이 없고 밭에도 먹을 것이 없고 우리에는 양이 없고 외양간에는 소가 없는 형편이 된 상태입니다. 그 당시 농경사회에서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여건이 도래했지만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한다”(합 3:17-18)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범사에 감사하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감사의 조건입니다. 이러한 감사를 회복해 나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1.23.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