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 청교도 이주 400주년 기념 책자 저자
남가주행복찬교회담임
4)청교도(淸敎徒, Puritans)들은 성경적 개혁(Biblical Reformed)을 이루려고 한 자들이었다.
미국과 영국에서 18세기에 대각성(大覺醒) 운동을 주도하면서 부흥운동에 앞장을 섰던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는 왜! 청교도를 존중(尊重)하는가를 간명(肝銘)하게 피력했다.
“청교도들은 환하게 밝히면서 타오르는 불꽃들이었다. 시골 창고에서나 들판에서나, 큰 길에서나 산울타리에서나, 그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기록하고 권위(權威)를 갖고 설교(說敎)했다. 비록 그들은 죽었을지라도 그들의 저술(著述)들은 여전히 말하고 있다. 바로 지금 이 시간에 그들은 감동적인 어조로 동참하고 있다.”
초기 청교도인 존 쥬웰(John Jewel, 1552-1571)은 성경에 관하여 설명하기를 “성경의 신적 기원(起源)과 인간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能力)을 준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자에게 기쁨을 가져다주고 결과적으로 말씀에 따라서 더욱 경건(敬虔)해진다”라고 말했다.
청교도들은 교회개혁의 우선순위로 영국교회 안에 남아 있는 미신(迷信)적인 요소를 제거(除去)하는 것으로 삼았다. 영국교회 안에서 시행되는 십자가 성호(聖號)를 긋는 행위, 산파에 의해 유아세례, 견신례, 성찬상 앞에서 무릎을 꿇는 행위, 성찬식에 사용한 떡을 치료제로 환자에게 주는 것, 해산 후 여인의 정결예식, 사제나 사면과 같은 단어의 남용, 성자들의 날을 기념하는 것, 예수라는 이름이 불려질 때마다 무릎 꿇는 행위는 미신적이요, 인위적이요, 비성경적이라 주장했다.
이렇게 그 당시의 로마카톨릭교회(Catholic Church)의 사제(司祭)들은 지극히 정치적(政治的)이고 형식적(形式的)이고 세상적(世上的)이었다. 또한 영국 국교회(성공회) 역시 이러한 잔재(殘滓)가 많이 남아 있고, 그대로 용인(容認)되고 있었다. 특히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영국 국교회가 헨리 8세 때 수장령(首長令, Acts of Supremacy)을 선포하며 로마카톨릭과 결별(訣別)했지만 예수님이 아닌 왕이 교회의 통치자(統治者), 머리가 됨으로서 교회는 국가의 시녀(侍女)로 전락(轉落)했다는 것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당시 성직자들 가운데는 글을 읽을 줄 모르는 까막눈도 많았다고 한다. 결국 설교 없이 의식(儀式)만 거행되는 예배가 만연(蔓延)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고 빈곤 및 도덕성의 상실로 사회와 경제적인 불안이 심각했다. 이러한 암흑(暗黑)의 시대에 청교도들은 국교회의 예배의식을 반대하고 초대교회(初代敎會)와 같은 순수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다. 그리고 성경을 연구(硏究)하고 그 성경을 기초로 죄와 회개와 구원의 은혜를 중심한 설교를 강조하였다.
또한 이들은 거룩과 경건(敬虔)을 생활의 절대적인 요소로 삼았다. 결국 청교도들에 의해서 종교개혁의 모토인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라는 온전한 성경적 개혁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
청교도의 개혁운동은 예배개혁에서 교회정치개혁으로 옮겨갔고, 나중에는 정치개혁으로 나아갔다. 국교회의 탄압 속에서도 설교운동 등으로 동조자를 늘려, 제임스 1세 시대에는 그들 요구대로 “흠정역성서(1611)”가 나오게 되었고, 마침내 찰스 1세 때 혁명(革命)이 일어나 청교도는 크롬웰(Oliver Cromwell)의 지휘 아래 왕정(王政)을 쓰러뜨리고 공화정(共和政)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공화정은 11년으로 끝나고 왕정복고(王政復古)와 국교회의 부활로 청교도는 비국교회파가 되었다. 비록 영국 국교회 내에서는 그들의 뜻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지만 청교도들은 영국 개신교 종교개혁의 주역(主役)들이 되었고, 미국 청교도들의 모체(母體)가 되었다.
청교도 개혁운동은 예배개혁에서 교회정치개혁, 정치개혁으로 나아가
미국 건설은 청교주의 영향...17C 청교도 사회를 이상적 세계로 간주
5)청교도들은 개신교(改新敎, Protestantism)의 형성에 큰 영향(影響)을 주었다.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는 “청교도주의(淸敎徒主義, Puritanism)는 궁극적(窮極的)으로 하나의 정신구조(構造)요 하나의 정신(精神)입니다. 저는 주장합니다. 초기의 청교도들이 칼빈주의(Calvinism)적인 전통을 따르는 장로교였으나 이후에 여러 개신교(改新敎)의 산실(產室)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물론 다른 시각(視角)에서 바라보면 더 초기적인 형태의 청교도는 침례교도라고 말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청교도들이 오늘날의 개신교(Protestantism)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청교도(Puritans)는 서방교회의 ‘교황중심주의’의 핵심인 ‘제도중심주의’로부터 영국(England) 국교회의 순결(purity)과 ‘복음중심주의’를 추구하며 16세기에서 17세기에 활동한 개신교도들이다.
당시 영국국교회는 왕권 하에서 형성되어 개신교의 정신을 강조한 ‘복음중심주의자’들이 거부하던 서방교회의 ‘제도중심주의’를 받아들여, 부분적인 종교개혁 사상과 교회제도를 주장하였다(Julie Spraggon., “Puritan Iconoclasm During the English Civil War”). 디아메이드 맥클로흐(Diarmaid MacCulloch)는 청교도들을 종교개혁의 ‘복음중심주의’를 지향했던 기독교인들로 통칭한다.
청교도들은 개신교 교인들로서 전통적 복음주의(evangelism) 안에서 루터주의 계열과 칼빈주의 계열, 잉글랜드 성공회에 소속된 이들과 전통 복음주의를 추구했지만 계열을 추구하지 않던 이들을 포함한 다양한 전통(傳統) 복음주의자들을 통칭(通稱)하며 개신교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청교도 운동은 1559년 엘리자베스(Elizabeth) 영국 여왕의 등극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국가중흥을 위해 종교적 관용정책을 펴자, ‘피의 메리’(Bloody Mary)의 박해를 피해 대륙에 가 있던 800여 명의 개혁자들이 귀국하였다. 이들은 칼빈과 같은 개혁자들의 가르침에 따라 영국교회 안에 남아있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잔재를 제거하고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국자들의 미비한 태도로 말미암아 종교개혁의 기치를 계속해서 이어가지 못했다.
1580년경 로버트 브라운(R. Browne)이 “지체 없는 개혁”(Reformation Without Tarrying for Any, 1582)이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점차 고조되었다. 브라운은 초대교회의 순결한 상태로 돌아갈 것과 신자로 구성된 참된 교회를 조직할 것을 주장하였다. 브라운의 주장에 동조하는 무리가 리처드 크라이턴(Richard Clyfton)을 중심으로 1606년 스크루비(Scrooby)에서 ‘고백자들의 모임’이라는 비밀집회를 결성하고 영국교회로부터 철저한 분리를 주장하면서 분리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사회에 대하여 매우 배타적(排他的)인 입장을 취하였으며, 세상의 문화에 대하여 명백한 분리(分離)를 주장하는 등 반문화적인 입장(Christ against culture)을 취하였다.
1980년 이반젤리컬 쿼털리(Evangelical Quarterly)에서 짐 패커(Jim Packer)는 청교도를 하나의 부흥(復興)운동으로 보았다. 영국에는 리처드 벡스터, 존 번연, 존 로저스가 있었고, 이들보다 덜 알려진 목회자들로서는 케임브리지에서 멀지 않은 케딩톤(Kedington)의 사무엘 패어클로우(Samuel Fairclough)와 서머셋의 마을인 멜즈(Mells)에서 사역한 그의 아들 리처드 패어 클로우(Richard Fairclough)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강력한 각성(覺醒) 사역을 통해 많은 영혼을 수확(收穫)했다.
청교도들은 종교(宗敎)의 자유를 위해 고향을 등지고 신대륙(新大陸) 미국으로 정착하여 오늘날의 미국의 교회와 정치, 교육,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쳤으며,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영국교회 내에서도 장로교회, 영국의 회중교회, 분리주의교회, 감리교회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특히 아메리카에 이주한 청교도들에 의하여 미국의 건설은 청교주의(淸敎主義)의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청교도들은 정치참여를 한정(限定)된 교회구성원으로 제한(制限)하였고 특히 종교적으로 거듭난 자들에게 전적으로 위임함으로써 일종의 엘리트(élite) 정치를 실시하였다.
이렇게 집회소를 중심으로 한 그들의 촌락공동체, 지방분권적인 정치제도의 발달은 미국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중앙에 파견하는 대표자를 직접 선출(選出)하고 세금에 의한 공공사업을 펼쳤다는 것은 미국 정치의 중요한 근본(根本)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청교도들이 갖는 독특한 선민의식(選民儀式)은 미국인들의 낙천주의(樂天主義, optimism)와 깊은 관련이 있다.
지금도 미국인들은 17C 청교도 사회를 이상적인 세계로 간주하고 있으며 물질주의(materialism)와 세속주의(世俗主義, secularism)가 극도로 치달을 때마다 17C 청교도(淸敎徒) 사회로의 복고(復古)를 주장한다.
kimjoyh@hotmail.com
09.12.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