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한인연합교회, 웨스트민스터 Ph. D, 역사신학
교회 안으로
교회 문턱은 낮아야 한다. 누구든지 마음 편하게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어야 한다. 형편과 처지가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실상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을 자세히 살펴보면 매우 흥미롭다. 직업, 신분, 취미, 세계관, 학력, 출신, 가치관, 판단기준, 연령, 심지어 신앙의 연조도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하나를 이루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교인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통일성을 지니고 있다. 각기 다른 구성원들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품을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다. 영적으로 건강한 교회 공동체에 속한 성도들은 순수한 복음을 구심점으로 하는 신앙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어떤 인간적인 노력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 교회는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곳이다.
그렇다면 현대 교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성도들이 교회에 모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무엇이 교회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가? 교회의 문턱은 반드시 낮아야 하지만. 교회 공동체는 그 안으로 들어온 자들에게 분명한 신앙의 기준을 제시하여야 한다. 그 이유가 분명하다. 자칫 종교성을 지닌 자들의 협동조합이나 사교집단과 같은 모임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통일성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의해 실현된다. 어두운 영혼을 밝히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를 통한 죄 사함의 믿음으로 회심을 경험하게 된다. 반드시 극적인 경험이 동반되거나 한 순간에 이뤄지지 않아도,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함으로 진정한 기독교 신앙인의 정체성을 지니게 된다. 교회 공동체의 통일성에 대한 판단을,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교회에 잘 출석하고 헌금생활을 하고 있는지, 담임 목사와 지도자들의 요구대로 헌신하고 봉사하고 있는지, 맡겨진 직분과 부서 활동을 활발하게 수행하고 있는지 등의 외부적 기준에만 맡겨둘 수 없다.
교회를 잘 섬기고 봉사하는 일은 신앙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종교 활동을 하는 곳이 아니다. 신앙의 내용이 분명해야 한다. 그리기 위해 무엇보다 우선순위를 혼동하지 말아야한다.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신하는 신앙이 내적으로 확고해야 하고, 그 신앙이 행동으로 흘러나오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모든 외부적 요소는 종교적 활동에 불과한 것이다.
교인과 성도
타 종교를 믿던 자가 개종을 했다면 크게 기뻐할 일이다. 초기 초대교회를 구성한 성도들의 대부분이 유대교에서 개종하였다는 점과, 그 후 전도와 선교를 통해 기독교 신앙이 확산되면서 타 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성도가 생겨났다는 점을 통해 십자가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켜 전혀 새로운 신앙을 갖도록 하는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 교회도 마찬가지다. 불교 또는 구교 신앙 등 종교에 열심을 내다가 전향하여 교회에 출석하는 경우가 제법 많다. 또한 모태신앙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멀리하였지만 어떤 일을 계기로, 또는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없었으나 성경을 접하고 난 뒤 기독교 진리를 이해한 결과 교회로 발을 향할 수 있다. 이민 교회의 경우에도 한국에서는 전혀 기독교 신앙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고 있다가 이민생활 중에 필요에 의해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교회에 출석함으로서 기독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준다. 특히 완고하여 마음을 전혀 굽히지 않던 자가 다른 성도들과 예배를 드리는 모습은 큰 감동을 준다. 이런 상황을 두고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었노라고 고백한다. 실상 그렇다.
그러나 그가 교회에 출석하였기에 이제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고 속단할 수 없다. 교회에 출석함으로 교회에 등록한 교인이 되는 것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통해 마음의 변화 받아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가 된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구원은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것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가 어떤 신앙적 체험을 하였고 그 후의 영적 생활을 지속하고 있느냐 일 것이다. 만일 이렇다 할 내적 변화에 대한 경험은 물론 관심조차 없고, 여러 종교가 주장하는 진리를 비교해본 결과 기독교가 가장 마음에 들어 선택하였다고 하다면 반드시 십자가 복음을 제시하고 그 앞에 마음의 무릎을 꿇도록 해야 한다.
기독교를 종교적 틀에 가두려는 오류는 반드시 중단
진정한 개혁은 먼저 내면 살피는 신앙회복으로 시작
종교로서의 기독교
기독교는 종교인가, 아닌가? 어떤 의도의 질문인지에 따라 답이 다를 수 있다. 먼저, 만일 기독교 신앙을 단순히 인간에게 부여된 종교성의 발로 정도로 이해한다면,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답해야 한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종교성을 부여받았다. 그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심으로, 인간이 하나님이 전달하시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다. 예를 들어, 자연에 담겨있는 창조의 질서를 통해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양심을 지니고 있기에 비록 완벽하지 않아도 도덕적 분별력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타락한 인간이 그 능력을 함부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즉, 죄의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종교성을, 원래의 목적과 전혀 다르게 자신이 원하는 일에 사용한다.
이에 반하여, 만일 기독교 신앙을 인간이 하나님과의 맺는 관계라고 의미한다면, 기독교는 종교이다. 그러나 기독교를 종교로 정의할 때에 반드시 주의하여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타 종교인들이나 일반 종교에 관심을 지닌 자들의 내리는 정의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종교에 대한 정의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다.
성경은 종교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라는 틀에서 설명한다. 물론 동등한 관계가 아니다. 그 출발점을 하나님 자신으로 소개한다. 그 하나님은 인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특히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역사에 대한 계획과 실천이 없었다면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성립될 수 없다. 하나님은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알리시는 분이며 이로서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해하고, 신뢰하면서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종교란 무엇인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이 질문은 우문처럼 들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기독교와 종교의 관계는 고민거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복음을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더욱 알아가고 생명을 다해 그를 섬기는 삶에 집중하였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각 개인의 종교적 경험이 교회 공동체와 어울려 지속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신앙이 완벽하였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 중에도 속사람이 변화되지 않은 채 신앙인의 모습을 보였다가 결국 배교하거나 이단종파로 빠지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그렇기에 교회 공동체는 더욱 각 성도들에게 참 신앙이란 바로 아는 일과 아는 대로 살아가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중세교회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제창하였던 초대교회가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개혁의 대상
중세교회가 어떻게 변질되었기에 개혁의 대상이 되었을까? 우리가 이 부분에 관심을 가져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다. 현대교회를 제대로 살피면, 그들의 모습이 고스라니 재현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세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각 성도의 내적 신앙보다 조직으로서의 교회가 강조되면서 기독교가 매우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시켰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복음이 확장됨에 따라 교회가 조직화 된 것은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다행스런 일이다. 가정교회와 지역교회의 규모를 넘는 상황에 맞추어 구심점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노력을 오류라고 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가 서유럽 전역을 장악하게 되고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점차 초대교회가 가장 중시하였던 신앙의 모습,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것과 그대로 행동하는 신앙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치명적 실수였다.
기독교는 서유럽의 종교였다. 유럽인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삶이 전개되었다. 사회 전체가 매우 종교적이었었다. 주일이 되면 미사를 드리기 위해 교회를 찾는 것을 당연시 하였다. 교회에 출석하는 행위가 구원을 약속받는 길이었기에, 특정한 신앙적 고민을 지니거나 의문을 제시할 필요가 없었다. 중세교회의 신학 자체가 구원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자아냈기에 성도들이 종교적 덕을 쌓는 일에 매달린 결과 외향주의가 강조되는 종교관이 자리 잡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이 제시한 신앙은 외적 형식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자유분방한 교회 공동체나 개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이 가르친 진정한 종교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통하여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내적 경건이, 성화된 삶이 강조된 것이었다. 즉, 그들은 종교적 형식의 틀 자체가 기독교 신앙의 전부가 아니며 자신의 의지를 담은 신앙적 행동보다 먼저 성령의 역사를 통한 마음의 변화를 강조한 것이다.
현대교회 안에도 교회에 출석함으로 종교적 문제를 해결하였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있다. 마치 교회가 구원을 베푸는 곳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면 반드시 시정되어야 한다. 형식주의는 근본적 교회개혁을 위한 중요한 필수내용 중 하나이다. 어떠한 신앙적 의지나 희생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씻음을 받고 변화를 받고 그와 연합된 삶을 지속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종교적 틀에 가두려는 오류는 반드시 중단되어야 한다. 진정한 개혁은 외적인 변화를 추구하기 전 먼저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신앙을 회복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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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0.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