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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결론, 행복한 증인 –직접적인 변화, 간증있는 삶, 거룩한 부담–

전남수 목사 (알칸사 제자들교회)
전남수 목사

세상, 절기 신자

 

고난주간이 지나고 부활절도 지나갔다. 많은 성도들이 주의 고난을 묵상하며, 부활의 기쁨을 노래했다. 그러나 절기가 끝나자마자 부활절 배너 교체하듯,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간 신자들이 많다. 부활의 감격과 상관없이 마치 은혜를 받은 적 없다는 듯, 다시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모습들을 본다. 

참된 성도는 부활절이 지나고 나서, 삶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명하는 사람들이다. 절기 동안만 뜨겁고, 절기가 지나면 식어버리는 믿음은 증인의 자격이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단 하루만 죽고 부활하신 분이 아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의 매일의 삶, 일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복음을 믿고 사랑한다면, 절기가 아니라 삶 전체로 그 사랑을 증명해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난 뒤, 바로 증인의 삶으로 뛰어들었다. 절기를 기다리지 않은 것이다. 마음이 뜨거울 때만 움직이지 않았다. 주님을 만난 그 순간부터, 그녀는 삶으로 주님을 증거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성도의 당연한 결론이다.

 

부활, 직접적인 변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일이다. 그분의 오심은 단순히 한 인물의 등장을 넘어, 인류 역사를 둘로 나누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래서 역사는 BC와 AD로 구분된다. 더 나아가 주님의 부활로 인한 역사의 전환은 개인의 삶에도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인생은 누구나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생로병사의 흐름 속에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나 죽음은 끝이 아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자에게 죽음은 천국 소망으로 이어지는 영광스러운 시발점이다. 구원의 은총과 감격은 죽음이라는 인생의 절망을 넘어 영생의 삶을 이 땅에서부터 누릴 수 있게 하시는 능력이 된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제자들의 변화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기점으로 제자들은 놀라운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베드로이다. 복음서들을 살펴보면 베드로는 다혈질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베드로는 천방지축으로 주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하다가 사탄이라는 책망을 듣기도 하였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해 주님의 책망을 받았다. 허물이 많고 약한 존재가 베드로였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실패한 베드로를 먼저 찾아오셨다. 인간은 실패자와 실수를 정죄하기 쉽지만, 주님의 방식은 다르다. 주님은 허물 많은 자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먼저 찾아오셨다. 의심 많은 도마에게도 찾아오셨고, 숯불을 피워놓고 떡과 생선을 준비하셔서 제자들과 함께 아침을 나누셨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조용히 회개를 이끌어내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 물으셨다.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셨다.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비교하지 말고, 오직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오직 성령, 변화의 증인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이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셨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며 마지막 훈련을 마무리하셨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성령이 임할 것이며,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약속대로 오순절에 성령께서 임하셨다.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다. 베드로는 일어서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며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라고 외쳤다. 그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린 자들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는데, 그 수가 삼천 명이나 되었다.

한때는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던 베드로였다. 그러나 이제는 일정한 기도의 시간을 정해 성전을 향해 가던 중에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병자도 일으키는 사람이 되었다. 더 나아가 그는 담대히 핍박자들을 향해 외쳤다. “사람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다”. 이처럼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달라진다. 부활은 단순한 감동이나 사건의 기억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은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변화, 기쁨, 소망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부활의 기쁨과 소망을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믿음은 감추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는 것이다. 세상의 비난과 박해 앞에서도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고백하게 된다.

베드로는 실패자였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후 증인의 삶을 살았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였다.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부르심이다. 부활을 경험한 사람은 증인이 되어야 한다. 부활을 믿는다면, 그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말과 삶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야 한다. 부활 그 이후,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을 만난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 세상 끝날까지 주님께서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생명 빛, 반드시 증인

 

기독교 신앙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맛보아 경험하는 신앙이다. 단순한 이론이나 사상, 철학이 아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의 고백과 순종의 삶 위에 세워진 신앙이다. 그래서 주님의 참 은혜를 경험하고 나면, 결코 은혜를 거슬러 침묵할 수 없게 된다. 복음은 감추어질 수 없는 생명의 빛이며, 그 빛을 받은 사람은 그 빛의 인도를 따라 반드시 증인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부르심의 마땅한 본질이다. 은혜를 경험한 자, 성령 받은 자는 반드시 증인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영역주권 사상을 많이 이야기한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 전부가 아버지의 일이라는 사상이다. 동의한다. 그러나 우선순위가 분명한 가운데 말해야 하지 않을까? 가장 기본되는 예수를 전하고, 알리며, 예수 이름의 능력으로 영혼을 건지는 증인의 일을 감당하는 가운데, 비로소 자신의 직업생활도 의미가 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이원론적인 생각으로 영속을 구별한다고 오해를 받을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두나미스 복음의 능력이 그 삶을 붙들었을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를 쫓으며 마침내 주님의 뒤를 따라 십자가를 지기까지, 아낌없이 증인의 자리를 붙든 것이 성경에 나타난 증인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본질, 증인의 정체성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잃어버린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증인의 정체성’이다. 우리는 말씀을 많이 듣고, 다양한 신학적 배경안에서 훈련을 받는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는 매우 소극적이다. 예배의 은혜는 넘치지만, 그 은혜가 삶 속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은혜받은 자가 전하지 않는다면, 아직 은혜를 깊이 체험하지 못했거나 그 은혜를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은혜는 책임을 낳는다. 주님의 사랑을 아는 자는 그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주님의 용서를 받은 자는 다른 이에게도 용서와 소망을 전해야 한다. 은혜는 개인의 감정적 만족에서 멈추지 않는다. 은혜는 반드시 입을 열어 손과 발을 움직이는 전도로 이어져야 한다. 이는 목회자나 선교사에게만 해당하는 사명이 아니다. 모든 성도,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모든 사람, 부활의 은총과 감격을 맛본 이들의 구체적 사명이다.

사도 바울도 이 사실을 고백한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바울은 주님의 은혜가 자신에게 헛되지 않게 하려고 누구보다도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박해자에서 전도자가 되었고, 교회를 핍박하던 자에서 교회를 세우는 자가 되었다. 주님의 은혜가 그의 삶을 통째로 뒤바꾼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부르심이 있다. 우리는 단지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주님의 증인으로 살아야 한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때로는 전도지가, 때로는 작은 친절이, 때로는 눈물의 기도가 사람의 마음을 열게 함을 기억하면서, 증인의 책임에 순종해야 한다.

 

삶의 전환, 최고의 행복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반드시 변화를 경험한다. 땅의 관심사에서 하늘의 관심사로, 자기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한 삶으로 방향이 전환된다. 이 변화는 외적인 환경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시작되는 영적 혁명이다. 삶의 목적이 새로워지고,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믿음은 단순히 마음속의 감정이 아니라, 삶 전체를 전심으로 이끄는 열정이 된다. 

더 나아가, 주님 만난 것이 부담이 아니라, 최고의 복임을 고백하게 되며, 간증있는 삶을 살게 된다. 최고의 생기와 소망을 맛보는 행복자가 되는 것이 증인의 삶이다. 어떤 형편과 사정도 중요하지 않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을 통해 증인의 삶을 잘 보여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부끄러운 인생을 살아왔지만, 주님을 만나고, 영생의 복음을 듣고서는, 부끄러운 과거에 사로잡힌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최고의 증인이 되었다.

이 여인은 공식적인 사도도, 유력한 지도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 사회에서 멸시받던 존재였다. 그러나 복음은 그러한 사회적 위치나 과거의 삶과는 무관하게 역사하심을 본다. 복음의 능력은 전달자의 자격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순종에 있음을 알게 한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들은 자라면, 증인될 수 있다. 간증거리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되는 것이다.

 

참 성도의 결론, 증인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이라면, 그 결론은 언제나 동일하다.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주님의 양식을 먹고, 주님의 일을 행하며,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삶이야말로 은혜받은 자의 마땅한 자리이다. 진짜 증인은 무대가 끝난 뒤에 증명된다. 부활절 이후, 당신의 삶은 주님의 부활을 증명하고 있는가? 아니면, 언제 은혜를 받았는지도 잊어버리고 있는가? 하나님은 절기 신자를 찾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증인을 찾으신다. 이것을 거룩한 부담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증인의 삶은 최고의 행복한 인생을 간증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davidnjeon@yahoo.com 

05.03.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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