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롯장로교회
오랜 신앙생활을 영위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묻게 되면 쉽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있다. "예수 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 대답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예수님을 닮아가려면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십자가를 더욱 묵상하여야 한다. 십자가를 묵상하려면 본문을 깊이 성찰하여야 한다. 고난주간과 부활절을 보내며 우리는 십자가를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다. 십자가 주위에 인류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가룟 유다, 또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이다. 두 사람 다 예수님을 배반하였다. 모든 인류의 모습이다. 사람에게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가룟 유다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하고 누구보다 예수님을 앞장서서 섬기던 베드로가 실패하였는가? 그리고 그는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하였는가?
1. 자기 과신에 사로잡힌 베드로
누가복음 22: 31-32에서 예수님께서 이미 경고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사단이 밀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네가 믿음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였다." 이렇게 경고를 받은 베드로는 당연히 꿇어 엎드려 예수님께 간구하여야 하였다. " 예수님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여러번 말씀하시던 십자가를 지실 때가 되었습니까? 저를 위해서 기도하여주십시요. 저도 최선으로 꿇어 엎드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겠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반드시 기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 라고 하여야 하였으나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저는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습니다."라고 큰 소리를 쳤다.
필자는 정말로 베드로가 그렇게 각오하였다고 믿는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각오를 하였다손 치더라도 기도하지 않는 나를 어떻게 믿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오히려 베드로는 정말로 겸손하게, 정말로 자신을 너무나 잘 아는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답게, 무너져 통곡하며 기도하여야 하지 않았을까? "내가 이만하면 되었지, 나보다 더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나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오늘날 한국교회와 교포교회가 문제가 있다면 너무 자존감이 높아진 것이다. 너무 자존심이 커진 것이다.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제대로 된 신앙생활인데, 더욱 제대로 된 예배인데... 지나친 자부심이나 전통과 관록 혹은 경험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우월의식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있는 신앙이 필요한 것이요, 큰 소리가 아니라, 지금도 말씀대로 다 살지 못하여 안타까워하는 겸손의 자세가 필요하고, 자신만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시여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라고 말씀을 하셨던 시편 51편 17절 말씀과 같은 눈물을 흘리는 태도로 늘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야 실패하지 않고 늘 승리할 수가 있는 것이다.
2. 바른 기회 포착에 실패한 베드로
만일에 베드로가 예수님의 심각한 충고를 신실하게 받아들이어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하고 기도하며,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 하나님께 큰 은혜를 입고 성령충만하여 예수님과 함께 대제사장의 뜰에 서서 이렇게 외치었다고 가정하여 보자. "여러분 조심하세요. 나는 이 예수님과 함께 3년 반을 함께 지나면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가르쳐 주시는 성경말씀을 통하여 수도 없이 바로 이 예수님께서 이땅에 보냄받으신 메시아이심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메시아로서의 기적을 수없이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고, 어려운 중풍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죽은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수도 없이 체험하였습니다. 조심하세요. 구원을 위하여 이 예수님을 믿으세요." 라고 외치었더라면 무슨일이 일어났을까? 상상하여 본다.
틀림없이 그곳에는 택함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지 않았을까? 오순절 성령강림후에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을까? 심지어 사도행전 6장 7절은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도에 복종하니라" 고 하지 않았는가? 만일에 그곳에서 잘못 사주를 받아 예수님을 정죄하는데 급급한 사람들 중에 한 두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다면, 어떤일이 일어났을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을까? 한 사람 예수 믿는 사람 아리마데 요셉 때문에 자칫 버려질 수도 있었던 예수님의 시신이 깨끗한 새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되었고, 또 한 사람 예수믿는 니고데모 때문에 예수님의 시신에 몰약과 침향 섞은 것 백 근을 드리어 향품처리 되시게 함으로 당시의 임금님 시신이 받는 향품을 받으시게 되지 않았는가 말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똑같은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안 된다고 할 때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할 때는 오히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체험되고 증거되기 참 좋은 때이다. 성경은 이런 일로 가득 차 있지 않는가? 우선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골리앗은 여섯 규빗 한 뼘의 키이기 때문에 거의 3m 가까운 키에다가 완전군장하고 40일 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을 조롱하여도 사울왕부터 그 누구하나 나서서 이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절대 불가능한 싸움을 한 사람, 살아계신 하나님 만을 믿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갔던 다윗 한 사람 때문에 불가능이 제거되고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이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바로 이 신앙이 필요한 것이다. 불가능하게만 느껴지는가? 힘이 들게만 생각되는가? 오히려 그때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어 살아계심이 증거되는 중요한 때인 것이다.
3. 통곡할 수 있었던 베드로
예수님께서 제 일 차 성찬식을 거행하시고 찬미하며 감람산 곧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었다. 여덟 제자들을 입구 쯤에 두신 것 같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따로 가셔서 곁에 두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하셨다. 돌던질 만큼 그들에게서 떨어져 사력을 다하여 기도하신 후에 세 사람에게 가 보니 잠만 자고 있지 않는가? 깨우며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 탄식하시듯 말씀하시고 두번째도 똑같이 기도하신 후에 다시 와 보니 또 자고 있지 않는가? 또 깨우고 책망하시고 경계하시고 세번째 기도하신 후에 붙들려 가셨다. 제자들은 다 도망치고 말았다.
늦게야 정신이 들은 베드로만이 멀찍이 따라가 아마도 대제사장의 친척인 요한의 교섭으로 대제사장의 뜰에 들어온 것 같다. 추우니 불을 쬘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때 한 여종이 나와서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베드로 대답하기를,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조금 있다가 다른 사람이 "너도 그 도당이라" 베도로 대답하기를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그런데 세번째 문제가 생기었다. 한 시간쯤 있다가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이 사람은 요 18: 26에 의하면 귀를 짤린 말고의 친척이라 하였다. 얼마나 정확하게 뚫어지게 보았겠는가? 그리고 벌써 갈릴리 말과 유대지방의 말이 다른 것을 알고 있지 않는가?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그는 자신을 저주하며 맹세하여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딱 잡아 떼었다. 보라! 준비가 되지 않은 가련한 한 영혼을!! 바로 그 때 닭이 울었다. 61절은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말씀인데,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 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알량한 자기 목숨 하나 구하려고 그렇게도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주께서는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었다. 무슨 장면인가? 목숨을 걸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준비하신 예수님은 지금 아마도 수백 억 톤은 족히 될 만한 온 인류의 죄를 지고 계신 그 순간에도 베드로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놓치 않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포기하신 적이 없다. 이 사랑이 온 몸에 와 닿을 때 베드로는 견디지 못하고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며 회개하였고, 일생을 살면서 닭이 울기만 하면 그 순간 예수님을 배반한 자신이 생각이 나서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고 마음 속으로 통곡하고 회개하기를 계속하였다. 이것이 그를 위대한 사도로 만들지 않았는가?
결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신 적이 없다. 괘씸하기 짝이 없으실 텐데도 에덴동산의 아담도 찾아오시고, 범죄한 다윗도 나단으로 찾아오시고, 부활의 주님을 만났는데도 자신이 다 없어진 갈릴리 해변의 베드로도 찾아 오신다. 그래서 언제까지나 주님과 함께 살도록 관계를 회복케 하시고 그 주님과 하나되어 인생을 회개하고 회복한 후에 새 역사를 일으키게 하신다. 우리도 중요한 시기에 안일주의 세속주의 물질주의 무관심주의로 타락한 나를 회개하여 주님과 하나되어 언제까지나 주님과 함께 새인생을 출발시키는 위대한 시간들을 맞이 하도록 하자!!
1970년대 후반 오혜령이란 배우는 연세대를 졸업한 후에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면서 당시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다 잘 할 수가 있었다. 수필작가, 희곡작가, 방송인, 배우로 살아가던 그녀는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하늘을 찌를듯한 그녀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자연히 바쁘기 짝이 없는 삶을 살면서 예수믿는 것도 교회에 나가 예배하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마음대로 인생의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 자연히 무리를 하였고 점점 나빠지는 건강을 돌볼 겨를도 없이 뛰고 또 뛰었다. 그러던 어느날 정말로 더이상 견딜 수 없는 아픈 몸을 이끌고 겨우 시간을 내어 찾아간 병원의 의사가 "왜 이제야 왔는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건강을 망칠 때까지 인생을 무리하였는가?" 나무라더니 앞으로 3 달 후에 죽을 것이라고 하였다. 갑자기 3 개월 시한부 인생이 된 위암과 임파선 암 말기 환자가 되어 하루하루 죽을 날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하루 하루를 견디기 어려운 나날을 보내며 3 개월이 지난 어느날 매주 한번씩 백합 50 송이를 보내던 후원자가 그날도 변함없이 백합 50 송이를 보내왔다. 하도 기가 막히어 조용히 백합에 코를 파묻고 약 30 분이 지났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그 순간, 그날도 물만 마셔도 토하고, 혈변을 계속하는 다 죽어가던 자리에 누군가 찾아 오시었다. 예수님이 변함없는 사랑의 방문을 하신 것이다. 오시어 목덜미를 낛아 방바닥에 나 뒹굴어지게 되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죽음의 한 복판까지 찾아오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앙탈을 부리고 나니, 모든것을 다 잃어버리고 아무도 찾지 않는 그녀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몰라라 하고 살아온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예수님께 죄송하여 통곡하며 회개하고 또 회개하였다. 6 개월을 회개한 후에 마침내 용서받고 고침받은 그녀는 의지할 곳 없는 독거 노인들을 돌보면서 하루 9 시간씩 기도하며 새인생을 살았다. 찾아오시는 예수님,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예수님 그분을 다시 만나 언제까지나 주님과 함께 새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통곡하고 회개하여 새인생을 살게된 오늘의 베드로가 다시 탄생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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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