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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된 사모, 행복한 사역

5 사모의 가정 가꾸기(3)

황순원 사모 (CMF사모사역원 원장)

결혼의 삼요소중 두 번째는 연합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니” 연합이란 두 사람이 서로 다르지만 함께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two becomes one).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실 때 서로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결혼이란 서로 다른 성이 만나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결혼의 대상을 찾는 청년들을 보면 서로 다른 것에 매력을 느껴 이성에게 다가가게 됩니다. 그러나 결혼한 후 함께 살다보면 서로 다른 것 때문에 싸우다가 결국 헤어지는 부부들이 있습니다. 서로 다름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연합하여 함께 걸어가도록 만들었으므로 서로 다른 부분을 알아내 어떻게 적응해야 하는가를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연합하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 있는데 이것을 4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적응하기(Adapt)

배우자의 서로 다름을 지적하고 판단하기보다는 적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가 어떻게 다른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재질이 다릅니다. 남자의 재료는 흙이고 여성의 재질은 뼈입니다. 이것은 성향을 표현해줍니다. 기호가 다릅니다. 남성은 시각과 후각이 발달한데 비해 여성은 청각과 촉각이 발달돼있습니다. 남성의 시야는 좁고 깊은데 비해 여성은 넓고 얕습니다. 그래서 남성들은 짙은 향수냄새를 풍기며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이 지나가면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옆에 있는 아내에게 들켜서 혼이 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멋진 남성이 지나가도 곁눈질로 얼마든지 즐길 수가 있습니다.

남성은 두 가지 이상을 동시에 할 수 없지만 여성들은 동시에 몇 가지씩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두 가지를 못하는 남편을 볼 때 답답합니다. 대화의 형태도 다릅니다. 여성들은 목적보다는 관계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길게 나열하는 형태로 대화를 합니다. 그러나 남성들은 결론부터 알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답답해합니다. 아내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다 듣기도 전에 결론을 알고 싶어 다그칩니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하면 아내들은 섭섭해 합니다. 아내들은 이야기하는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아내가 직장에서 돌아오자 짜증을 내면서 “여보, 직장에 나가기 싫어. 부장이 보기 싫어 짜증나거든”하며 머리 아프다고 얼굴을 찡그립니다. 이런 아내를 보는 남편은 당장 구직광고난을 보면서 아내의 직장을 찾아봅니다. 아내는 더 짜증이 나서 “나, 지금 머리아파 죽겠어”하며 신경질을 부리며 쏘아부칩니다. 남편은 타이레놀을 갖다주며 “이것 먹어”라고 합니다. 아내는 또 소리를 지릅니다. “누가 타이레놀 먹고 싶다고 했어?” 남편의 말 “그럼, 타이레놀이 아니고 아스피린인가?”

아내들은 대화 자세를 관계에 두기 때문에 문제해결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남편이 알아주기만 하면 됩니다. 이때 남편이 아내에게 “당신, 오늘 수고 많이 했네, 고마워” 한마디면 아내들은 머리 아픈 것도 다 나을 수 있습니다. 남편들은 이때 “그럼, 처음부터 안아달라고 하지, 왜 머리아프다고 하는지...” 아내들의 마음을 남편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래서 남편들에게 말하기를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내들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사랑의 효과가 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서로 적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를 알아야 합니다.

어느 미국인부부가 30년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이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변호사와 함께 서류절차를 밟기 위해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남편은 닭요리를 시킨 후 음식이 나오자 닭다리를 잘라 아내에게 줍니다. 변호사는 마음을 놓으면서 이 부부는 잘하면 다시 합하게 될 것 같다고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여보, 당신은 30년간 나에게 닭다리를 주었어요, 나는 닭다리를 제일 싫어하거든요. 가슴살을 좋아하는데...” 하는 말에 남편의 대답은 “여보, 무슨 말을... 나는 내가 좋아하는 닭다리를 먹지 않고 당신에게 주었어요. 30년동안 먹고 싶은 닭다리를 한 번도 내가 먹지 않고 당신에게 주었는데 이제와서 무슨 말이오”하면서 티격태격 다투다가 결말을 맺지 못한 채 헤어졌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남편이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나는 생각해서 아내에게 닭다리를 주었는데 아니 아내는 닭날개를 좋아했단 말인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내는 전화기를 아예 꺼버렸습니다. 아내도 한참 생각에 빠졌습니다. “아니,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닭다리를 남편이 좋아하면서도 나를 주었단 말이지” 미안한 생각이 들자,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받지 않습니다. 한참 만에 어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당신의 남편이 지금 숨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빨리 오세요.” 아내는 즉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여보, 미안해 사랑해”라는 문자를 남긴 전화기를 손에 잡은 채 운명한 뒤였습니다.

내 방식대로 사랑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아무런 효험이 없습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을 주고받을 때 드디어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방식대로가 아닌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게 익숙한 것들은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에게 적응해주기 위해서는 수고의 땀을 흘려야 합니다. 부부가 성숙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내가 편한 방식이 아닌 상대방에게 편한 방식을 따라 하기 위해서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동반됩니다.

주님도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창조주이시면서도 사람의 모습으로 오셔서 온갖 불편함을 감수하셨습니다. 나아가서는 우리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기 위해서 친히 육신이 찢어지는 아픔과 통증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람은 말로만 할 때보다 실제로 행동으로 보여 줄때 감동을 받고 헌신하게 됩니다.

적응의 명수이신 예수님의 사랑은 온 인류를 감동시키신 사랑은 곧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강퍅한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 어떤 죄인도 구원 얻게 할 수 있는 그 능력, 이것은 사랑의 행동에서 나온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였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 ▲이메일:hwangsunwon@gmail.com www.godfam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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