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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기독교 문화일까?

기독교 문화 점검을 위한 세 가지 질문

선한 것을 매력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 뮤지컬 벤허는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세우려던 열심당의 역사적 스토리를 배경으로 하는데, 기마전차를 타고 대결하는 화려한 장면, 카타콤에 숨어 작은 촛불을 들고 조용히 소망을 노래하는 강력한 음향 효과, 노예에서 장군의 양아들이 되는 드라마틱한 순간 등 수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개인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시는 모습에서 오열을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 가장 의아했던 순간은 빌라도가 창기들의 화려한 춤을 즐기는 장면인데, 관중석에서 가장 크게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진 일이다. 두 시간 반가량 이어졌던 수많은 곡 가운데 압도적으로 가장 큰 환호와 박수 소리였다. 관중에게는 예수님의 골고다 길보다, 빌라도의 은밀한 파티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라는 당연한 사실에 새삼 놀랐던 경험이다.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기독교 소설로 큰 성공을 거뒀다. 사탄의 계급사회에서 선배 마귀가 신참 마귀에게 멘토링을 하는 이야기인데,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고민 상담을 통해 “믿는 자를 어떻게 쓰러트리는지” 전략을 제시하는 서른한 편의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에필로그에 루이스는 이 소설에 대해 시대에 맞게 확대 개정을 하자는 제안을 수도 없이 받았다고 고백한다. 이어서 개정판을 쓰지 않은 이유와 함께, 소설 속 편지를 서른한 편밖에 작성하지 못한 이유를 밝힌다. 그가 실제로 마귀의 입장이 되어 글을 쓰다 보니 영적으로 거의 녹다운이 되어 더 쓸 수 없었으며, 다시는 그런 영적 시련을 겪을 수 없어 개정판을 쓸 수 없다고 말이다. 루이스는 마귀 입장에서 썼듯이 천사들의 입장도 써야 하는 것이 맞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만약 마귀 ‘스크루테이프’가 아니라 천사장 ‘미가엘’의 편지로 소설을 썼다면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련하게도 본성이 죄인인 인간은 선보다는 악이 더 매력적으로 끌리는 마음의 자석을 장착하고 있다. 동시에 영적 거장 루이스가 아니었다면, 이런 마귀 입장의 편지 소설을 쓰며 마음과 삶이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사도 바울은 그의 열정적인 복음 사역 중에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고전 9:22)이라 고백하며, 이에 대해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고전 9:23)라고 설명한다. 바울의 전통을 따라 세상과 소통해 복음을 전하기 위한 많은 문화적 노력이 있어 왔다. 그들과 비슷한 모양이 되어, 이질감을 없애고 복음을 전할 틈새와 기회를 엿보는 노력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처럼, 그리고 예수님처럼,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며 삶을 나누고 그들의 삶을 고칠 권능의 사역을 꿈꾼다(마 9:10-13).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독일의 민요 가락을 빌려 힘찬 찬송가를 만들었을 당시, 그가 받았을 종교적 공격은 상상하기 힘들다. 웨슬리 형제가 서정적 찬송을 만들고 개혁을 꾀했을 당시, 그들은 매일 달걀을 맞아 멀쩡한 양복이 없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하다고 일컫는 찬송들은 문화전쟁을 이기고 마침내 울려 퍼지는 승리의 나팔과도 같다. 그뿐이 아니다. 오랫동안 타락한 매개체인 줄로만 알았던 추상화, 영상예술, 판타지 소설 등의 장르는 오늘날 복음을 나르는 중요한 수단이 된 듯하다. 문화와의 동행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었음을 쉽게 부인할 수 없다.

최근 한국의 유명한 워십팀의 ‘게임방 시리즈’ 편곡을 들었다. 게임 슈퍼마리오와 카트라이더의 음원 또는 BTS의 다이너마이트의 음원 등을 전통 찬송의 간주에 넣어, “장로님들 뒷목 잡고 쓰러지는 편곡”이라는 제목으로 유튜브에 올려 수준 높은 공연 실력을 보였다. 또 다른 잘 알려진 CCM 그룹의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찬송가 편곡이 화제다. 기존 찬송가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의 재즈 화성의 반주에, 악기 팀과 보컬 전원 선글라스를 끼고, 메인보컬은 미니스커트에 다리를 꼬고 앉아 다리를 흔들며 부르는 영상이 ‘세상 힙한 찬양’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그리스도인 감독이 만들고 그리스도인 배우들이 참여했다는 흥행 가도에 진입한 무당 주제 영화도 있다. 큰 이슈가 된 워십팀 들의 담당 목사의 간증들, 감독과 배우들이 매번 기도하고 시작했다는 오컬트 영화의 뒷이야기들이 기사와 영상으로 그들의 작품의 ‘선교적 마인드’를 뒷받침한다. 

복음을 위한 세상과의 소통, 복음을 위한 젊은 세대의 문화와의 소통, 아름다운 표현이다. 소통의 의미는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고,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기독교와 세상과의 소통이 막히지 않고 오해가 없으며 뜻이 서로 통한다’는 명제는 참으로 이상하다. 세상 문화가 기독교를 탄압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가고 있다면, 세상과 소통이 너무 잘 되는 것에 대해 의심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성육신하신 예수님께서 실제로 눈을 보고 육성으로 말씀하셔도 종교주의에 물든 세상은 듣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설교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들을 귀가 없었다. 복음은 소통이 아니라 선포해야 하는 엄청난 소식이다. 

이 세대는 문화 점검을 위한 모든 처방을 혐오한다. 윤리, 사랑, 선, 진실, 질서, 희생 등의 의미들로 기준을 세우는 것을 유독 싫어한다. 성과 생명의 자기 선택권 주장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이라는 논리로는 이길 수 없다. 예술 안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예술을 위한 예술”(Arts for Arts’ Sake) 사조는 종교와 정권과 윤리도덕의 참견을 막아낼 기가 막힌 방어막이다. 이 세대와 닮은 모양으로 복음을 전하겠다는 결심 속에, 그들이 가진 생각의 틀을 닮겠다는 결심만은 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 문화의 변화를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듣지 않더라도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문화에 대한 모든 종류의 태도에 깊게 머물러봤던 학자의 양심으로, 소란스럽지 않더라도 강력한 에너지를 들여 점검이 필요하다고 외치고 싶다. 그 첫걸음으로 변해가는 세상 속에 함께 변하는 기독교 문화를 점검할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하려 한다. 

 

1. 복음 전파인가, 종교적 구걸인가?

 

최근 중고등학생 학습과 세례 문답 교육에서 한 학생이 뛰쳐나오고 싶었다는 고백을 들었다. 세례와 입교를 위해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억지로 앉아 있고, 담당 교역자 목사님이 이제 대답해야 한다고 구걸하는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가장 큰 기쁨과 은혜의 순간, 아무 생각 없는 사람들에게 마지못한 응답을 구걸하는 문화가 되어버린 것 같아 듣는 순간 함께 참담함을 느꼈다. 

예로부터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바보 취급을 당해 왔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으로 인해 세상이 우리를 욕하고 핍박하고 악한 말을 할 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11-12). 차라리 바보로 불릴 때가 좋았다. 바보라는 말이 듣기 싫은 현대인들은 언제부턴가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되는 일을 자처했다. 에스겔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보며 탄식하시며 “그 지아비 대신에 외인과 사통하여 간음하는 아내”(겔 16:32)로 비유했다. 창기는 오히려 선물을 받고 값을 받지만, 이스라엘은 오히려 선물을 줘가며 행음하고, “값을 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줌이라”(겔 15:33) 고 한탄하셨다. 차라리 값을 받는 다른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오히려 선물을 줘가며 생명과 같은 귀한 것을 내준다는 의미다. 

최근 유행하는 “힙하다”라는 표현은 유행을 따르면서도 개성이 돋보이는 모습에 대한 칭찬이다. 힙한 퍼포먼스와 함께 펼쳐지는 찬송가는 선교적 도구인가, 아니면 귀한 것을 포기하며 내어주고 세상 문화의 관심을 구걸하는 행위인가, 우리는 점검해야 한다. 한 번 들어달라고 사정하며 대중의 인기를 위해 포기한 것이, 그리고 얻은 문화와의 소통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어떤 것인지 돌아보아야 한다. 대중의 안목이 두려워 장착한 ‘힙함’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함보다 앞서지는 않았는지, 진지하게 주님께 물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루터와 웨슬리는 아니며 바울과 루이스는 아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지만 우리가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선한 것을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애쓰는 모든 노력이 최고로 귀하신 예수님의 이름과 그 위상을 비웃음거리로 만들지를 않기를, 정말 소중한 것을 자존심 없이 내어주지 않기를 기도해야 한다. 

 

2. 기쁨인가, 엔터테인먼트인가?

 

성경에서 최고의 기쁨 표현은 ‘할렐루야’다.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의미의 할렐루야는 시편에 23번, 계시록에 4번 나오며, 그리스도인의 기쁨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잘 보여준다. 밧모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이 외쳤던 ‘할렐루야’는 그 편지를 읽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함께 외칠 것을 요구했고, 그들은 고난과 핍박과 환란 속 매일 죽음의 위협을 받는 자들이었다. 바울이 호되게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혀 쇠고랑을 차고 찬양했듯이(행 16:25), 할렐루야의 기쁨은 그런 것이다. 상황에 관계 없는 영원한 구주와의 연합으로 인한 기쁨이다. 

반면 엔터테인먼트, 즉 오락성 기쁨은 다른 종의 기쁨이다. 물론 오락성 놀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위르겐 몰트만의 핵심 신학이 담긴 그의 놀이의 신학(Theology of Play)을 읽어보라. 즐거움과 희락은 기독교의 본질을 설명할 귀중한 가치다. 다만 좋고 신날 때 춤추며 노래하는 단면적인 기쁨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게임 음원을 넣어 신나게 놀며 찬양하는 모습에 오락성이 보인다고 비판하는 경우는 아마도 그리스도인의 고난 속 피어나는 기쁨을 아는 자들의 우려일 것이다. 

할렐루야를 가장 진지하게 외쳤던 다윗과 요한의 상황적 깊이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진정성을 점검하기에 적합하다. 기쁠 때 찬양하는 것은 이방인들도 한다. 기독교의 참된 기쁨은 고난 속에서 피어나는 최고의 감정 상태다. 우리가 대하고 만드는 기독교 문화 콘텐츠가 요한이 말했던 할렐루야의 기쁨인지, 아니면 이방인이 단순히 춤추게 하려는 오락성 도구인지 점검하자. 

 

3. 사랑과 인내로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을 마주할 때, 보통은 두 가지의 태도 중 하나를 택한다. 첫 번째 태도는 부정하고 보지 않는 것이다. 듣지 않고 보지 않고 잃어버리려고 애써 무시한다. 두 번째 태도는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화를 쏟아낸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땅이 아닌 곳은 단 한 평도 없다는 사실, 그렇지만 죄로 물들지 않은 땅도 단 한 평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이다. 이 땅에 무균실은 있어도 죄 없는 땅은 없다. 우리가 성화를 이뤄야 할 곳은 먼지가 쌓인 땅 위며, 아무리 더러워도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의 땅이다. 

한 그리스도인이 장성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러야 하는(엡 4:13)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사랑하고 인내하기 위해서다(살후 3:5). 참고 기도하며 기다리며 지혜롭게 성령 안에서 가르치기 위해서 우리는 성장해야 한다. 무시와 비판이 아닌, 사랑으로 단호함과 겸손함을 지키는 것은 에너지가 아주 많이 드는 일이다. 바울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1:31) 고 호소했다. 한국의 교회는 비판이 아니라 바울처럼 인내함으로 사랑으로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며 가르칠 그리스도인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음의 문화를 꿈꾸며, Soli Deo gloria!

by 서나영, TGC

04.20.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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