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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여, 쉼 없이 회중을 사로잡는 설교를 갈망하라

설교를 듣는 것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몇 주 전, 나는 The Keller Center 설교 섹션에 목회자가 설교를 준비할 때 “모서리를 찾는 것”이 왜 중요한지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모서리를 찾는 것은 다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성경 본문 속 전제, 태도 및 적용이 우리가 세상에서 “상식”으로 간주되는 요소와 어떻게 대조되는가? 이 본문이 세상적 또는 삶의 사고방식과 충돌하거나 대립하는 지점이 어디인가? 모순이 가장 날카롭게 부각되는 곳은 어디인가? 

모서리 탐구는 설교자가 지나치게 길고 종종 지루한 설교에 안주하지 않고 교인들의 관심을 붙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설교에 매력이 있어야 한다거나 모서리를 찾아야 한다거나 하는 것을 타협의 길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교인의 유익이라는 미리 정해진 조건에 따라 메시지를 전달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여나 이런 접근 방식이 사람들이 꼭 들어야 하는 것보다 듣고 싶어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지나치게 신경 쓴다는 의미일까? 사람들이 느끼는 “필요”에 기초하여 설교를 작성하는 건 아닐까? “구도자에게 민감”해지도록 성경의 거친 부분을 깎아 내거나, 설교를 “매력 있게” 만들려고 노력함으로 설교자로서의 신념을 희생하는 건 아닐까? 

이런 우려를 함부로 일축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신약성경에도 가려운 귀를 만족시키려는 유혹을 받는 목회자의 모습이 등장한다. 오늘날에도 성경을 제쳐두고,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정치 또는 사회 문제를 가지고 사람들을 결집하려 하거나, 복음과는 동떨어진 조언이나 제공하면서 건강하지 못한 방법으로 설교자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교인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설교의 목적이 인기 콘테스트에서 우승하는 것이라면, 그런 설교자가 성경 본문을 얕고 피상적으로만 파악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견고하고 성경에 충실한 설교가 사람들을 지루하게 만들 리는 없다.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고, 내용의 심각성이 어조에 잘 반영되도록 열정을 담아 전달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독교 주석가의 영원한 관심사였으며 지금도 그렇다.

유창함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

 

On Christian Doctrine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썼다. 

애정의 표현이라고 해서 반드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고 정해진 건 아니다. … 또는 반드시 다양한 담론이 듣는 이들이 짜증 내지 않고 주의를 집중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 동경하거나 회피하게 하는 마음을 만드는 것은 발명되는 게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존 카바디니는 그의 글 “The Sweetness of the Word”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접근 방식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주요 목표는 단지 배운 것을 가르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을 감동”시키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건전한 가르침”을 제시받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기쁨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단순히 진실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가르침이 “지혜”롭거나 “건전”한 경우라면, 거기에 유창함이 더해지는 것이 더더욱 중요하다. 

설득이 목표가 아니라면 연설은 아예 할 필요가 없다. 몸을 더 강하게 만들지 않는 운동, 접시가 절반만 찬 식사, 쓴맛 때문에 환자가 삼킬 수 없는 약 등등, 이 모든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의학적 비유를 사용한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달콤하게 말하고, 현명하게 말하는 사람은 건전하게 말한다. … 그러나 치유의 힘이 있는 달콤함, 혹은 달콤한 치유의 힘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단맛을 더욱 간절하게 갈구할수록, 치유의 힘은 더 쉽게 발휘된다. 

유창함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찬사는 교만에서 비롯한 게 아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듣고 나가면서 교인들이 “저 설교자 참 대단하지 않니?”라고 말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그는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경험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피력하고 있다. 설교자의 메시지가 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의 아름다움을 더 잘 알고 진리와 더욱 사랑에 빠지도록 도움을 주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쉼 없이 흥미로울 것

 

나는 설교하는 것을 좋아한다. 몇 년 전, 나는 우리 교회에서 초대 목사로 섬겼다. 2021년부터는 두 번이나 임시 목회직을 맡아 주간 메시지를 전했고, 또 전국 각지의 여러 교회나 콘퍼런스, 대학에서 설교할 기회가 있었다. 

어디에서 설교하든 내 목표의 하나는 설교가 시종일관 흥미롭게 하는 것이다. 설교가 너무 흥미로워서 사람들이 주의를 집중하지 않는 게 힘들게 하는 것, 그러면서 그들이 계속해서 성경 본문을 보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면에서 설교가 쉼 없이 흥미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딴짓하는 게 집중하는 것보다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항상 잘한다는 건 아니다. 이 목표가 쉽지 않기에 나는 되도록 설교를 길게 하지 않는다. 이삼십 분 정도면 목표를 달성할 거 같지만(물론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 삼십오 분을 넘기면 아주 힘들어진다. 설교 길이에 관해서 물었을 때, 한 설교학 교수가 말했다. “정해진 길이는 없습니다. 교인들의 집중력을 잃지 않는 한도 내에서 설교하세요. 그런데 기억하세요. 설교자들 대부분이 자신이 실제보다 교인의 집중력을 십오 분 정도 더 오래 잡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설교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의 하나는 신뢰할 수 있는 몇몇 출처로부터 피드백을 받는 것이다. 피드백 없이 발전은 힘들다. 교인들이 당신의 설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 당신이 과연 교인들의 주의력을 붙잡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나님과의 만남

 

설교의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도록 하는 것이기에 설교 내용과 전달은 중요하다. 존 스토트는 모든 설교자의 열망에 대해 이렇게 썼다.

설교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감동적인 경험은 설교 중간에 회중에게 임한 이상한 침묵을 목격하는 것이다. 자던 사람이 깨어나고, 기침하던 사람이 기침을 멈추며, 산만하던 사람이 갑자기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 누구의 눈도 또 마음도 흔들리지 않는다. 모두가 듣고 있지만, 그들이 귀를 기울이는 대상은 더 이상 앞에 선 설교자가 아니다. 어느새 설교자는 잊히고, 교인들은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다. 

팀 켈러도 비슷한 말을 했다. 설교가 기록할 가치가 있는 통찰로 가득 차야 한다는 건 맞다. 그러나 그 설교에 펜과 메모지를 다 제쳐두고 우리의 구원을 이룬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경외에 차서 멍하게 만드는 지점이 없다면, 결국에는 실패한 설교이다. 레이 오틀런드(Ray Ortlund)는 이렇게 상기시킨다. 

설교를 듣는 것은 강의를 듣는 것과 다르다. 그것은 살아계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당신은 그의 영광을 보고 그것을 느끼고 변화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그에게 집중하고 설교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다시금 주목하자. 사람들을 휘어잡지 못하는 설교는 자격이 없다. 우리가 정말로 교인들이 그리스도를 만나길 원한다면, 설교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야 한다. 영광을 보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 영광에 걸맞은 설교를 하자.

by Trevin Wax, TGC

04.20.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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