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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에서 ‘함께’ 결정하라

결정 과정의 공유라는 기독교적 일의 가치

페인트 가게에서 일하는 점원 조(Joe)는 같은 일을 반복한다. 손님이 와서 특정한 색의 페인트를 주문하면 조는 해당 페인트를 골라서 기계에 섞고 통에 담아 손님에게 건네준다. 그다음에는 돈을 받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다음 손님을 받는다. 같은 일은 반복된다. 이 일은 잘하고 못하고의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조가 지각이나 결석을 한다면 그는 해고당할 수도 있다. 그의 상사는 조가 같은 일을 종일 반복한다 해도 제시간에 와서 해준다면 문제없다고 볼 것이다. 그렇다면 조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하는 일이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가 하는 일에 무슨 변화나 성장이 있을까?” “이 일이 내가 일하는 회사에 실제로 무슨 영향을 줄 능력이 있을까?”

이 이야기는 최근 출판된 요한 하리의 벌거벗은 정신력의 6장에 소개된 한 사례다. 저자는 일하는 현대인들은 이와 같이 영향력 있는 삶을 살려는 열망과 자기 인생의 실재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요한 하리가 페인트 가게 점원인 조 필립스와 인터뷰할 때, 그는 공허감 가운데 각종 중독에 빠졌음을 고백했다. 조는 이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일 속에서 아무런 기대를 갖지 못하고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그냥 먹고 살아야 하니까 무기력감 속에서도 일할 뿐이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쳇바퀴 돌 듯이 반복되는 업무 속에서 무의미하게 일하고 있을까? 이 책의 저자는 2012년 142개국을 대상으로 갤럽에서 행한 일 경험에 관한 조사를 예로 든다. 일터의 사람들 가운데서 자신이 맡은 일에 “참여하며”(engaged) 직장에 긍정적으로 기여한다고 답한 이는 13퍼센트에 불과하다. 반면 63퍼센트의 노동자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실제로는 “참여하지 못한 채”(not engaged) 마치 일하는 시간 내내 몽유병 환자처럼 시간만(에너지나 열정이 아니라) 축내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나머지 24퍼센트는 “적극적으로 일을 망치려고 한다”(actively disengaged). 이들은 일터에서 행복하지 않을뿐더러 바쁘게 자신들의 행복하지 않음을 증명하고자 다른 참여적인 동료들이 성취하려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기독교적 일의 신학은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근대 개신교 노동윤리와 직업 소명은 자신의 세속적인 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할 것을 가르쳤다. 하지만 성실, 인내, 정직의 기독교적 덕목을 강조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골 3:23)는 것으로는 처절한 일터 현실 속 그리스도인들에게 울림이 있을지 의문이다. 물론 1세기에 박해받는 상황에서 믿지 않는 육신의 상전을 모시며 인내와 진실함으로 자기의 일을 감당한 신앙 선배들의 귀감은 여전히 위로가 된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일터의 사람들은 수동적인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위에서 결정한 대로 지시에 따라 일할 뿐 자신이 하는 일이 전체 일의 계획과 진행 속에서 어느 부분을 맡고 있는지, 어떻게 목표하는 바에 기여하는지 모른다. 들리는 말로는, 고급 기술을 다루는 대기업에서는 직원들이 일의 전체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분업화시킨다고 한다. 나중에 퇴사한 뒤에라도 그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말이다. 기업의 자기 보호적 정책은 결국 종사자들을 일로부터 더욱 소외시킬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의 신학이 제시할 수 있는 기독교적 가치는 무엇인가?

요한 하리는 같은 책에서 또 다른 연구 결과를 소개한다. 한 정신과 의사가 영국의 일반 공무원 18,000명과 수년간 인터뷰를 한 뒤 재량권과 의미의 상관관계를 연구했다. 그런데 복잡한 일들 속에서 결정을 내리고, 그러한 결정으로 인한 책임의 중압감에 시달릴 고위직 공무원들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은 단순한 일만 처리하면 되는 하급직 공무원들에 비해서 1/4 수준이라는 것이다. 훨씬 더 많은 책임을 지닌 관리자들이 단순 반복 업무하는 이들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이다. 주도권과 통제력의 상실은 비록 일에 대한 책임 부담이 덜하더라도 자기가 하는 일의 가치를 경험하지 못하게 만든다. 

우울, 불안, 공황장애, 무기력증과 같은 정신적 질환들은 우리 사회에 쓰나미처럼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덮쳐온다. 우리가 깨어있는 시간 대부분을 일하면서 보낸다면, 일의 경험이 정신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일에서 재량권을 얻지 못한 대다수는 지금도 자신이 하는 일로부터 소외와 무의미라는 고통을 겪으면서 밥벌이의 신성한 임무를 묵묵히 감당한다. 인내와 순종을 가르치는 신앙의 권면이 일정한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의 신학이 이와 같은 일터의 구조적 문제를 간과하고 오롯이 개인에게 성실과 인내로 일을 감당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기독교적 정신 승리로 비칠 수 있다. 

일에 대한 기독교적 비전은 개인적 덕목의 차원뿐 아니라 일의 사회적, 구조적 문제에까지 포괄해야 한다. 일의 재량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정신적 고통을 겪는 현실에서 일의 신학이 내놓을 수 있는 해법은 무엇일까? 답은 성경에 있다. 창조의 기사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고 그에게 주신 첫 번째 과업이 바로 결정권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창 2:19). 하나님은 동물과 새들을 지으시고 그것들을 아담에게 보여주시며 이름을 짓게 하셨다. 그리고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른 대로 이름이 결정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창조 세계에 대한 청지기 권한을 부여하시는 첫 번째 상징적 사건은 바로 결정권을 주신 것이다. 아담의 결정 과정을 하나님은 관찰하시고, 그의 결정을 허락하셨다. 이름을 짓는 결정 과정에서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의력과 상상력을 동원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역량을 충분히 발휘해야만 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결정권이라는 고유한 역량을 일터에 접목한 사례가 있다. AES(Applied Energy Services)라는 민영 전력회사를 공동 창업하고 이 회사를 4만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전시킨 데니스 바키(Dennis Bakke)는 사람들에게 결정 과정에 동참시키는 것이 일터에서 가장 중요한 기독교적 가치임을 확신하였다. 그 자신이 매우 주도적이고 독선적인 성향이라고 고백하는 그는 직접 경영을 하면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은 바로 일의 결정 과정으로부터 소외되어 위에서 시키는 일만 강요당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셨다는 사실은 그분의 창의성과 미적 능력을 인간에게 부여하신다는 것이고, 아담에게 생물들의 이름을 짓게 하신 것은 인간과 결정권을 공유하신다는 것임을 믿고 이를 자신의 기업 경영에 도입했다. 모든 직원에게 직무와 관련된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서 결정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 것이다. 다만 자기 멋대로 결정하라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조언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해당 사안이 있을 때 최소한 5, 6명의 관련 경험자나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서 결정을 내리게 했다. 결정으로 인한 결과가 좋았다 하더라도 충실한 조언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질책을 받는다. 반면, 안 좋은 결과가 나왔더라도 충실한 조언 과정을 거쳤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함께 분담한다. 인간은 결정권과 창의력뿐 아니라 서로 협력해서 공동선을 이루는 존재로 부름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정권 부여와 조언 과정을 인적자원개발의 근간으로 삼은 AES는 기업의 사회적 가치와 인간 경영을 구현한 실험적인 모델로 평가받았다. 

데니스 바키의 이러한 성경적 일의 철학은 그의 저서 Joy At Work에 이야기 형태로 담겨 있으며, 그의 형제들이 공동 집필한 일의 즐거움 워크북에도 성경공부 교재로 전개되어 있다. 기독교적 일의 관점은 무엇이 달라야 하나? 그동안 일의 신학이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측면에서만 기독교적 일의 가치를 발견하는 경향이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 술 마시지 않는 법, 정직하게 세금 내기, 주일 성수 하기, 직장에서 험담하지 않기 등과 같은 윤리적이고 방어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신자 개개인이 직면할 수 있는 중요한 신앙 양심의 과제다. 신앙의 양심이 흔들리는 상황을 상대하고 극복해 내는 일터의 신앙인들을 위한 목회적 격려와 위로는 항상 필요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터에서 신앙이 있든 없든 사람들 대다수가 겪는 고통은 바로 일하면서도 일의 주도권과 재량권으로부터 소외되는 현실로부터 말미암는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존엄함과 결정권을 인정한다. 일터에서 결정권을 공유하는 것은 언뜻 낭만적으로, 또는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 있다. 데니스 바키가 AES의 최고경영자로 일할 때도 이사진과 대주주들로부터 그러한 우려와 공격에 시달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와 같은 창의성과 결정권을 부여하셨다는 성경의 말씀을 믿는다면 진지하게 실천을 모색해야 할 가치가 충분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오늘날 많은 사람이 바로 이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다면 성경적 일의 신학이 일터의 세계에 줄 수 있는 선물이 되지 않을까? 

먼저 작게라도 시작해 보자. 가정에서, 교회에서, 혹은 교회의 한 부서에서도 여러 결정해야 할 사안들이 있을 것이다. 가족 여행을 언제, 어디로 갈 것인지를 자녀들에게 연구하고 조언을 얻어서 결정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회 소그룹에서 기도회 순서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구성원들이 직접 결정할 수도 있다. 한 교회는 자기 교회의 예배 시간마다 낭송하는 신앙고백을 교인들과 함께 결정했다. 물론 조언의 과정을 충실하게 거쳐야 한다. 결정 과정의 공유라는 기독교적 일의 가치가 교회와 가정에서부터 체득된다면 그 가치는 또한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세속의 일터로 스며들 것이다. 더욱더 결정 과정에 참여할수록 책임감과 즐거움도 늘어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원형적 모습이다.

by 김선일, TGC

06.15.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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