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M(Eternal Perspective Ministries) 직원이 “어려서 죽는 경우에, 그게 제때에 죽은 건지, 아니면 미리 정해진 시간에 죽은 건지 어떻게 아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내 답변 영상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한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낙태로 죽는 아기는 어떤 경우인가요? 하나님이 아이가 낙태로 죽도록 정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미리 정해져 있다면, 뭣 하러 낙태 반대 운동을 하지요? 하나님은 사탄이 수많은 악을 저지르도록 허락하시고 또 동시에 우리가 책임감을 가지고 옳은 일을 하길 원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다 꼭두각시일 뿐이니까요.”
나는 솔직한 댓글을 남긴 사람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렇다. 인간의 선택과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는 크고도 어려운 질문이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고려해야만 하는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악, 고통, 저주를 포함한 모든 일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기에 인간에게는 변화를 일으킬 힘이 없다고 주장하는 게 운명론 철학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다수의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에서는 운명론이 우세하다. 아랍어 인샬라(Insha’Allah)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다 신의 뜻이라는 의미이다.
불행히도 일부 그리스도인―예를 들어, 극단적 칼빈주의자(hyper-Calvinists)―도 운명론자처럼 추론한다. “택함을 받은 사람은 어차피 하나님이 구원하십니다. 선택된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선교나 전도는 무의미합니다.”
기독교화된 운명론은 단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금 의역한 것보다 덜 직설적인 언어로 표현되기는 했지만, 나는 이런 논리를 여러 번 들었다. “주권적인 하나님이 인종차별, 노예제도, 성매매를 명령하셨다. 그것들은 엄연히 존재하며 하나님의 뜻은 좌절될 수 없다. 따라서 그것들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그것들을 철폐하고 싸워야 하는가? 그건 하나님에 대한 대항이다.”
복음주의 목사들 중에는 낙태가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냐하면, 요즘 같은 세상에서 낙태되지 않고 태어나는 경우에, 그중 대부분이 구원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란다.
이와 대조적으로, 성경은 사람들에게 행동을 취하고, 목소리를 내고,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도울 것을 요구한다(예를 들어, 잠 31:8-9과 약 1:27 참조). 이것은 운명론의 정반대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살기에 너무 위험하다. 악을 행하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앉아서 악이 일어나도록 내버려두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중 일부는 무관심에서, 일부는 운명론에서 비롯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악조차도 사용하신다. 그럼 죄를 막으려고 노력하는 순간, 나는 하나님의 뜻을 좌절시킬 수도 있는 위험에 처하는 건가? 아니다. 하나님은 불의를 막기 위해 개입하라고 명령하셨다. 우리가 행동할 때, 그의 도덕적인 뜻이 이루어진다.
성경은 인간이 진정으로 선택을 하고 악에 저항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전혀 운명론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주권을 유지하신다. 그는 우리에게 선택권을 주시고, 우리가 변화를 가져오도록 기도하길 원하신다. 또한, 삶과 세상 자체를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도록 격려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선포를 통해서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신다(롬 10:14-15 참조). 바울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 자니,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면하시는 것 같으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하나님과 화해하라”(고후 5:20)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잃어버린 자에게 다가가려는 열정이 없거나, 그렇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인간이 아무런 역할이 없다고 가정하는 냉정한 예정론의 언어가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운명론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모든 신학적 입장이야말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원래 추종자들에게는 이질적이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공존할 수 있다고 믿는 양립주의자들 중에서는 가끔 극단적 칼빈주의자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다. (많은 칼빈주의자들이 스스로를 “양립주의자”라고 부른다. 사실 나도 그런 사람이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주권과 양립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 양립주의를 이해한다.) 그들은 마치 양립주의가 하나님이 아니라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발명한 것처럼 인간의 선택을 최소화한다. 양립주의자라면서 마치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이 인간의 의미 있는 선택을 포용하기보다는 오히려 부정한다고 암시하는 것은 위선적이지 않은가? 왜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돕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시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책임을 묻는가? 스스로 선택하는 피조물로 가득 찬 우주의 주권자로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 하나님을 꼭두각시 인형 조종사로 보는 것보다 그를 더 영광스럽게 하지 않겠는가?
오해하지 말라. 하나님이 원하셨다면, 그는 얼마든지 꼭두각시 인형 조종사가 되어 우주의 모든 피조물의 모든 줄을 주권적으로 잡아당겨 항상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행하실 것이다. 물론 말씀 중에는 맥락에서 따로 떼어서 보는 경우에 그러한 관점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은 전체 성경의 더 큰 맥락에서도, 또 우리의 경험에 의해서도 맞지 않는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조금만 더 주의 깊게 듣는다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미 있는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드러내는 폭과 깊이와 아름다움 때문에 당신은 크게 놀랄 것이다.
by Randy Alcorn, TGC
02.01.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