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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회 신앙도서독후감 공모전 장려상 「탕부 하나님」을 읽고

교회가 더 이상 ‘형들의 세상’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구계자 사모 (뉴욕광염교회)

 

지난 5월 19일, ‘21세기의 C. S. 루이스’ 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탁월한 변증가이자 목회자였던 팀 켈러가 우리 곁을 떠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다. 자기의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하나님의 따뜻한 품에 안긴 것이다. 얼마 후, <세계한인기독언론협회>의 독후감 공모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마침, 우리 집 거실 책꽂이 한 켠에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는 책 한 권에 나의 시선이 멈춰 섰다. 「탕부 하나님(The Prodigal God)」. 이 책은 일전에 남편이 구입해서 읽은 후 꽂아 놓은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탕부 하나님」의 첫 장을 열었고, 어느 새 그의 이야기가 이끄는 곳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저자는 서두에서 기독교의 가르침을 잘 모르거나 한 동안 거기서 떠나 있던 사람들에게 ‘기독교 복음의 본질’을 알려주고 싶어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하면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익숙한 이야기 속으로 독자들을 초대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탕자의 비유’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저자는 이 이야기에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라는 새로운 제목을 붙여주었다.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께 돌아와야 할 아들은 둘째만이 아니라 ‘둘 다’ 라는 의미에서다. 

그러나 이 비유의 진정한 주인공은 따로 있다. 그 분은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은혜를 베푸시는 「탕부 하나님」이시다. 잃어버린 바 된 우리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두 팔 벌려 반갑게 맞이해 주실 아버지는 ‘앞뒤 재지 않고 아낌없이 다 내주시는(prodigal)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무모한 은혜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며,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라는 것이 바로 저자가 말하고 싶은 이 책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당시 예수님 주위에 있었던 두 부류 – 모든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 중 두 번째 부류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비유를 듣고 깨달음을 얻기보다 불쾌감을 드러내며 수군거렸다. 예수님은 둘째 아들의 ‘해로운 자기 중심성’만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맏아들의 ‘도덕주의적 삶’도 가차없이 질책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종교를 등지고 자아 발견을 시도하는 사람이나 도덕적으로 순응하는 종교적인 사람이나 모두 영적으로 잃어버린 존재이고, 삶의 길도 막다른 골목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류가 품어 온 생각들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맏아들과 같은 도덕주의자 신자들이 만연함으로 인해 기독교가 한낮 ‘종교’로 전락하고 있다고 저자는 안타까워한다. 

둘째 아들과 맏아들의 행동은 대조적이었지만 이면의 동기와 목표는 같았다. 아버지를 떠나 타향으로 떠난 둘째 아들도, 아버지와 한 집에 살았던 맏아들도 아버지와 심리적인 거리를 두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두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대신, 아버지를 이용해 자신의 이기적인 목표를 이루려 했던 것이다. 받은 유산을 다 탕진하고 거지꼴이 되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엄청난 환대를 받는다. 이것은 뼈저린 참회로 얻어 낸 것이 아닌,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가 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맏아들은 아버지가 동생의 신분을 회복해 주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격노하며, 아버지가 잔치에 들어가자고 타일렀지만 한사코 거부한다. 

이 이야기의 결말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는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마무리하신 이유는, 이 이야기의 진정한 청중인 맏아들과 같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보내신 메시지에 반응할 것을 촉구하신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한 마디로, 그 동안 우리가 안다고 생각해 온 모든 것들 – 죄, 잃어버린 바 된 상태, 구원 등 – 의 의미를 재 정의해서 알려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 “복음, 즉 진정한 기독교는 종교와는 전혀 다르다. 그 가능성에 부디 너희 마음을 열겠느냐?” 라고 물으신다(107쪽). ‘도덕주의와 종교의 병폐에 빠지지 않고도 하나님을 알 길이 있다고 저자는 희망을 주고 있다. 그 희망은 우리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진정한 형’ 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 형은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떠나 낮은 땅으로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빚을 갚아 주셨다. 그 형이 버림받으셨기에 우리는 아버지의 집에 은혜로 값없이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죄로 망가진 세상이기에 이 귀향 길이 쉽지는 않지만, 아버지의 잔치가 이미(already) 시작되었으니 “들어가 누리라!”고 저자는 외치고 있다. 그분의 구원에 기초해 살아가면, 결국 우리는 역사의 종말에 최고의 잔치와 만찬에 이를뿐 아니라, 미래의 그 구원을 기도, 다른 사람들을 섬김, 복음으로 인한 내적 본성의 변화, 지금 그리스도가 주실 수 있는 치유된 관계 등을 통해서 지금도 그 기쁨을 미리 맛볼 수 있다고 알려준다. 그러기에 ‘지금, 여기에서(here and now)’ 필요한 것은 ‘복음의 내면화와 생활화’ 라는 분명한 외침을 메아리처럼 남기고 그의 이야기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탕부 하나님」은 나에게, 나의 신앙과 내면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성찰의 시간과 함께 기대 이상의 깨달음을 선물해 주었다. 맏아들이 보인 미성숙한 모습 속에 지난날의 부끄러운 나의 모습이 투영되어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형(맏아들)을 구원의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것은 자신의 나쁜 행실에 대한 회개가 아니라 선한 행실에 대한 교만이다(116쪽).”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자신이 잘 한 일들의 동기까지 회개해야 한다. 바리새인은 죄만 회개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의의 뿌리까지 회개한다(117쪽).” 는 저자의 지적은 ‘자기 의’로 둔해져 있던 나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지난 날을 돌아보게 하고, 나아가 회개케 한 예리한 검이었다. 

또한 이 책을 읽어가면서 오늘날의 교회들을 향하여, 목회자들을 향하여,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형들’을 향하여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같았다. 세상은 왜? 교회를 향하여, 목회자들을 향하여,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지, 교회에는 같은 하나님, 같은 예수, 같은 성령, 같은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데 왜? 끼리 끼리 당을 짓고, 비판하며, 급기야는 교회를 등지고 떠나가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는지,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가 왜? 한 낮 ‘종교’로 전락하여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물으시는 하나님께 반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동생들의 마음에 가 닿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교회가 생각보다 형들의 세상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41쪽).” “우리의 문제들은 다분히 우리가 끊임없이 복음으로 돌아가 그것을 내면화하고 생활화하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169쪽).” 는 저자의 예리한 분석에 구구절절 동의가 되어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누구든 혼자서는 성장할 수 없으므로 신앙공동체로서 교회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하면서, 우리 교회 또한, ‘형(맏아들)들의 세상’이 되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면서, 동생(둘째 아들)들에게 다가가 그들을 품을 수 있는 그런 교회로 성숙해 갈 수 있도록 나에게 주어진 역할에 열의를 다 하리라 마음먹었다. 

청년이나 장년, 노년 등 세대를 막론하고, 목회자(영적 리더)이든 성도 든 구별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동생 부류의 사람들이나, 형 부류의 사람들 모두에게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은 필독서가 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진정한 형’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무모할 정도로 헤프게 베푸시는「탕부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60대 초반에 있는 나에게도 작은 책 「탕부 하나님」은 ‘나도 앞뒤 재지 않고 아낌없이 다 내주시는(prodigal) 그 아버지의 딸’이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해 주었고, 머지않아 돌아가게 될 ‘아버지의 성대한 잔치 집’을 기대하게 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내면화하고, 삶으로 살아내는 데 더욱 힘쓰면서,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멋진 비전 – 기독교인의 가정을 치유하고 회복해서 다시 세우는 일(가정사역) – 을 기꺼이 감당해 가리라는 다짐을 공고히 해 주었다. 어느 새 그가 그리워지는 가을이다. 

03.02.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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