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와 장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와 장애 문제를 다루면서 헨리 나우웬이 바라보는 장애는 죄의 결과인지 아닌지 따지지 말고 장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로 여기라는 것이다. 장애인은 사랑이 없는 곳에서는 짐과 부담만 될 뿐이다. 그러나 사랑이 있는 공동체 안에서는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자가 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장애인일지라도 사랑 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임을 드러낸다.
1. 장애와 죄
세상에 왜 죄와 불행이 있을까? 하는 신정론(theodicy) 문제에 관한 통상적인 답변 중에 하나는 하나님이 그냥 지나치도록 내버려 두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긍정적 부정적 의미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정론에 관한 설명을 비성경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자칫 죄와 불행은 하나님의 능력과 뜻 밖에서 발생될 수 있다는 식으로 오해할 수 있다.
죄와 불행도 하나님의 능력과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 즉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있다. 욥이 당한 고난도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 사탄이 일으켰다. 만약 장애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발생된 것이 아니라면 그것만큼 비참한 일도 없을 것이다.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불행이 나에게 발생되었다는 것처럼 외로운 일은 없다. 원하는 바가 아니지만 장애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발생된 일이어야 오히려 희망이 있고 삶의 의미가 있다. 중요한 것은 장애 자체가 아니라 장애를 입었든 입지 않았든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인간의 고난과 장애는 근본적으로 죄 때문에 에덴에서 쫓겨남으로 시작하였다. 에덴에서는 고난도 없고 장애도 없었다. 그러나 모든 장애가 1:1로 죄와 연결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의 죄, 술 취한 운전자 때문에 교통사고를 입어 장애인이 될 수도 있고 돈에 대한 욕심을 가진 사장이 공해를 일으키는 공장을 지어 주변 신생아들이 장애아로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고난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장애가 그 사람의 죄라는 생각은 많은 종교에서 가르쳐왔다. 불교에서는 인과응보라는 차원에서 현세의 장애와 고난은 전생에서의 죄 때문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장애인을 죄인 취급을 하고 유교에서는 사람의 육체는 부모에게서 받은 것인데 훼손하면 불효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장애인은 불효자가 되었으며, 인간은 물질로만 되었다는 공산주의 유물론에서는 장애인은 중고차 정도 취급을 받는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고귀한 존재라고 말하고(창1:27) 장애도 누구의 죄냐를 묻지 않고 그 장애를 통해” 하나님의 하시는 나타내게 하려함”(요9:3)이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9:1-3).
이 말씀대로 그는 예수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다(요9:24-33).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장애나 이웃의 장애를 생각할 때 “누구의 죄냐?” 하고 과거 지향적으로 묻지 않고 “이 장애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
고난과 장애를 입을 때 누구의 죄냐를 따지기보다는
사랑의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 고난을 통해 이루실 주님의 계획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자신의 죄가 아니더라도 고난이 온 경우를 우리는 욥을 통해서 혹은 바울의 경우를 보아서 알 수 있고 혹시 죄를 지어서 고난이 온다 하더라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신 주님께서 그 고난과 장애도 좋은 것으로 바꾸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롬8:28).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고통과 장애라도 저주가 없고 오직 우리 유익을 위한 훈련만 있을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지나게 된 것은 물론 그들의 불순종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 40년 동안을 훈련의 기간으로 바꾸셔서 주님을 더욱 아는 기회로 만드셨다. 욥은 까닭 없이 고난을 당했지만 그 고난 때문에 욥이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증거 되었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로 고생을 했지만 오히려 그 가시 때문에 주님의 능력을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고후12:9). 그리고 고후 1장에서 말하듯이 바울은 힘에 지난 고생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지만 그것은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주님을 의지하는 계기가 되었고 또 그 때 주님께 받은 위로로 다른 고난 받은 사람을 위로 할 수 있게 되었다(고후1:6).
그러므로 고난과 장애를 입을 때 누구의 죄냐를 따지기보다는 사랑의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 고난을 통해 이루실 주님의 계획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나우웬이 돌본 장애인 아담도 자신의 실수나 부모의 잘못도 아닌 알지 못하는 이유 때문에 간질하는 장애인이 되었다. 그 부모는 누구의 죄냐고 과거를 묻지 않았고 사랑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나우웬은 아담의 장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아담은 진과 렉스 아내트의 둘째 아들로 1961년 11월17일 캐나다에서 장애인으로 태어났다. 태어남 자체가 수난이었다. 잘 걸을 수도 없고, 정상적인 생각을 할 수도 없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하여 말로 표현하거나 글을 쓸 줄도 몰랐다. 일반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누리는 자유를 그는 누리지 못했다. 무한한 능력을 가진 예수님이 유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을 때처럼 그는 처음부터 제한성을 가진 장애인으로 세상에 왔다. 그는 자신의 잘못이나 부모의 실수가 아닌 알지 못하는 이유 때문에 간질을 하는 장애인이 된 것이다. 만약 아담의 부모가 누구의 죄 때문에 아담이 장애인이 되었는가 하고 질문만하고 다녔다면 그들은 아담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하심을 믿었다. 죄의 유무를 알 수 없지만 아담을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로 아담을 받아들이고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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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7.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