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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모르는 당신에게

그리스도인의 나다움 찾기

인간의 창조적 힘은 언제나 경이롭다. 한국의 유명한 래퍼이자 프로듀서이기도 한 지드래곤(GD)이 최근 ‘위버멘쉬(Übermensch)’라는 음악앨범으로 활동하며 국내외 각종 주요 음원사이트 1위를 기록했다. ‘위버멘쉬’는 니체(Friedrich W. Nietzsche)의 철학사상을 대표하는 용어로, 한국말로 ‘초인’ 또는 ‘극복한 자’로 풀이되며, ‘자신을 넘어선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작년(2024) 파리 올림픽 개막식 ‘최후의 만찬’ 피날레에 ‘예수님’ 대신 등장한 ‘디오니소스’는, 니체가 섬긴 ‘그리스의 음악적 신’이다. 니체는 당시 ‘신의 죽음’을 통감하는 허무한 인생들에게 ‘음악으로 긍정하는 법’을 가르쳤다. 이성과 지성보다 우선하는 것이 ‘창조의 힘’을 가진 예술적 의지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니체의 가르침은, 인간을 주체적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은 신이 아니라 ‘창조적이며 디오니소스적 힘에의 의지’이며,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함’으로 새롭게 개척해 가는 ‘예술적 삶’을 살라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 그가 말하는 ‘예술적 삶’이란 ‘음악 속에 즐겁게 춤추며 찾아가는 자신의 주체성’이다.

세계 속 수많은 팬들이 춤을 추며 ‘위버멘쉬’를 외치고, 성공한 이들의 자기계발서에는 ‘하나님 없이 인생을 긍정하고 자신을 넘어서는 법’에 대해 도전하고 있으니, 니체가 바라보던 세상은 오늘날 그대로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그 영향력은 나날이 커지고 있는 듯하다. 하나님과 그의 초월적 신비함을 내몰고, 인간의 감성과 지성을 사랑하게 된 모습이 그렇다.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니체는 뛰어난 음악성과 재능을 가지고 신학을 공부했었다. 하지만 무신론에 매력을 느껴 신학을 그만두고, 결국 기독교의 진리가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데카당(decadent)’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기독교적 삶이 언제나 절제하며(고전 9:25) 예수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워가는 삶(골1:24), 온갖 시련과 불 시험(벧전 4:12-13)을 기뻐해야 하는 삶, 온세상에게 미움을 받는 삶(요 15:17-18; 17:14)이어서만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기독교의 불행은, ‘이미 정해져 있는 기독교의 진리로 인해 더이상 생각하지 않게 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와 연관이 있다. 그에게 기독교의 도그마는 창의적 힘을 발현하지 못하게 하고, 진정한 자신의 사유 능력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니체의 조롱은 오늘날 우리가 답해야 하는 중대한 질문이 되었다.

당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행복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 니체가 말하듯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삶을 깊이 수용해서 ‘지친 얼굴과 모습’으로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예술적 삶’보다 더 새로운 날들을 성령님과 함께 열어가고 있는가? 혹은 열정을 다해 열심히 교회가 마련한 ‘틀에 박힌 생활’에 만족하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이 소비하는 즐겁고 감성적인 음악보다 더 행복하게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가? 당신은 하나님의 관계 속에 즐거워하며 고난 속에도 춤춰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진정으로 역동적인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고 있는가?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의 삶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일을 하시는가에 관심이 쏠려 있으며, 개개인 역시 그 관계 속에서 그의 사역의 일부를 이루기를 원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이 삶을 이루기 위해 근본적인 질문 하나를 품고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앞에서, 나라는 존재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오래 동안 깊이 생각해야 하며 상당히 신중한 대답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언제나 빠르고 정확한 답을 찾고 싶어 하는 우리는 너무 쉽게 두 막다른 길로 가게 되기 때문이다.

첫 번째 막다른 길은 지나치게 분석적이고 구체화된 규정을 제시하는 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비함을 잘 다루지도 잘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은 언제나 무지(無知) 속에서 기다리는 일이 발생하거나, 아니면 예측할 수 없는 역동성에 몸과 마음을 맡기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두움과 불확실 속에서 뭘 해야 하는지 모르며, 불편해하고, 그 상황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 서든지 그 공백을 채우고 하나님의 역동적 신비를 길들이려 하며, 그의 주권적 일들을 설명하고 명명하고 이용하려고 한다. 그렇게 열심히 분석해서 프로그램을 열심히 짜고, 교육과정을 개설하며, 하나님을 섬기도록 지도하는 사업을 개설한다.

이러한 통제적 설계와 행동 규칙이 때로 굉장히 유용하지만, 우리가 품은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온전한 대답이 되기는 힘들다. 우리가 이러한 책임을 떠안게 되는 순간, 마치 아담의 선악과처럼, 하나님 대신 선악을 판단하는 자리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우리의 방법이나 컨디션이나 타이밍에 맞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에 그의 방법대로 하시는 일이다. 우리는 분석하고 전략을 세워 마치 우리가 이 구원 사역을 책임지고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염려하고 어설프게 열심을 다해 통제하려 하지만, 우리는 책임자가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 일에 우리를 사용하시지만, 그 때와 방법에 대해 우리와 상의하지 않으신다. 그의 방식대로 그의 리듬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 막다른 길은,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시도록 나의 생각과 활동을 최소화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길이다. 현존하는 한국의 유명한 성경해설가의 설교에는 매번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망쳐 놓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경고하며, ‘차라리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기 위해 우리는 덜 일할수록 좋고, 우리가 일을 멈출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시작하신다는 가르침이 그 요지다. 그러나 이는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성경 말씀과 역사를 통틀어 하나님께서는 어떤 식이건 우리의 참여와 행동을 요구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그의 역동적 일에 참여하는 일’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감각과 생각이 최고조에 달할 때 가능한 것이 아니다. 뛰어난 감성도 탁월한 지능도 방해만 될 뿐이다. 오직 모든 감각이 주님을 향해 깨어 있을 때 가능하다. 때로는 침묵 속 하나님 존재에 대한 감탄으로, 때로는 깊은 고난의 터널에서 부르짖는 기도로, 때로는 함께 모여 주님을 찬양하고 예배함으로, 때로는 손을 뻗어 이웃에게 행동함으로, 때로는 일터에서 그의 거룩함을 따라 창조함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방법을 배워 나갈 때 우리의 역할을 얻을 수 있다.

기독교적 삶은 미리 정해지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자유롭게 해방된다는 뜻’이다. ‘삼위일체’라는 신학적 용어는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생명력과 리듬감 때문에 옛 그리스 신학자들로부터 ‘춤’의 비유로 설명되곤 했는데, 그 원형 댄스는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 불린다. 칼 바르트(Karl Bart)는 페리코레시스는 ‘하나님의 실존 양식은 너무나 완벽하게 서로가 서로를 조건 짓고 침투하는 것이라서, 언제나 하나는 다른 둘 안에 있고, 또 그 다른 둘은 그 하나 안에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 춤은 손을 잡고 원을 그리며 회전하고, 손을 놓기도 포옹하기도 하며, 빨라지거나 더 몰아치거나 느려질 때가 있으며, 때로는 아주 섬세한 발걸음으로 맞추어야 하고, 때로는 그 다음 스텝을 예측하지 못해 온 몸의 감각을 그저 상대방의 스텝에 맡겨야 할 때도 있다. 즐거운 역동성 속에 실수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까지 맡긴 채, 때로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서도, 그의 리듬에 맞춰 행동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며, 우리들이 춰야 할 춤이다.

‘그리스도인의 나다움 찾기’는 그렇게 시작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그의 역동적 리듬을 따라 발을 디딜 때 당신의 독특한 존재가 드러나며 진정으로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 된다. ‘수많은 군중 속 관람자’가 아니라 ‘초월적 일의 참여자’가 되며, ‘멈춰 있는 자’가 아니라 ‘성장하는 자’가 된다. 당신이 ‘진짜의 나를 찾는 길’은 예수님 손을 잡고 삼위일체 하나님 속으로 가는 길(요 14:6) 외에는 없다.

그 다이내믹한 춤을 추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예수님도, 다윗왕도, 욥도, 예레미야도, ‘마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것만 같은’ 느낌 속에 기도한 흔적을 읽는다. 그와 신비의 춤을 추겠다고 결단했다고 해서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을 경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마 27:46). 매일 찬송을 불러도 의심에 대한 면역력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나만큼이나 하나님을 다 이해하지 못했던 성경 속 동료들과 함께 리듬에 맞추어 기도를 드릴 뿐이다. 영원이라는 음표들 속에 잠시 숨을 고르는 쉼표의 즐거움을 만끽하며, Soli Deo gloria!

by 서나영, TGC

 

05.03.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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